
그야말로 숏폼 전성시대다. 스치고 지나가는 짧은 영상에 너무나 익숙하다. 숏폼 영상들이 소비자들의 눈길을 지배하다 보니 호흡 긴 콘텐츠들이 점점 자리를 잃어간다. 숏폼은 이미 게임·만화 콘텐츠의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가 돼 버린 지 오래다. 심지어 기존 OTT(스트리밍서비스) 드라마까지. 오래 끄는 드라마 재생시간을 참지 못하는 소비자들이 많다. 숏폼이 미디어 소비패턴을 그렇게 바꿔놨다.
숏폼 전성시대에 시청자들의 눈길을 끄는 긴 호흡의 감성 드라마가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은 초반 낮은 기대에도 배우들의 열연으로 조용히 입소문을 타며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다. 이 드라마의 인기 비결은 뭘까.
넷플릭스 공식 미디어 허브 투둠(Tudum)에 따르면 지난달 12일 공개된 은중과 상연은 공개 2주차에 글로벌 톱10 시리즈(비영어) 부문 5위를 기록했다. 국내에서도 매주 5위권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2주차에는 시리즈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최근 시청 트렌드로 짧은 콘텐츠가 대세로 자리잡으면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도 숏드라마, 미드폼 예능 등 다양한 시도를 하는 추세다. 하지만 은중과 상연과 상반기 화제작 ‘폭싹 속았수다’처럼 가족, 우정 같은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롱폼 시리즈를 찾는 시청자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누군가의 일기장 펼쳐본 듯”…우정, 조력 사망 등 심도 있게 다뤄
은중과 상연은 10대부터 함께한 친구 은중(김고은)과 상연(박지현)이 서로 동경하고 미워하면서 얽히는 이야기를 다룬 15부작 시리즈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펼쳐본 것 같다는 한 리뷰처럼 잔잔한 줄거리에 시선을 사로잡는 캐스팅도 아니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감정 선을 세밀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먼저 이 드라마는 숏폼에서 다 담아내기 어려운 인물의 복잡한 내면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관계 변화를 밀도 있게 담았다. 시청자는 주인공인 은중과 상연의 10대, 20대, 40대의 삶을 긴 호흡으로 따라가면서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닌 삶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을 느낄 수 있다.
우정, 질투, 사랑, 열등감, 조력 사망 등 묵직한 주제를 심도 있게 다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줌으로써 시청자들의 여운도 길게 이어진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은중과 상연을 보다가 “울다가 지쳐 잠들었다”며 남기는 인증샷이 올라오기도 했다.
애증 얽힌 여성 스토리…상연 선망하는 은중, 은중 질투하는 상연
두번째 이 드라마는 기존 한국 드라마에서 잘 다루지 않던 여성 관계의 복잡성을 다뤘다. 애증과 함께 두 사람이 삶의 여러 국면에서 욕망, 갈등, 상실 등을 경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가난한 환경의 은중이 부유한 상연을 선망하지만 상연은 사랑받는 은중의 평범함을 질투한다. 또 은중의 선의가 상연에게 때론 굴욕감을 주는 복잡성도 보여준다.
다만 두 여성의 인생 전체를 다루다 보니 이야기의 호흡이 길고 반복되는 감정선으로 피로감이 느껴진다는 의견도 일부 존재한다. 또 두 사람의 이야기가 중심이라 주변 인물들은 대부분 감정의 촉매제 역할에 그친다는 시각도 있다.
주연 배우들의 열연…섬세한 작가 필력·감성적인 연출 어우러져
마지막으로 김고은, 박지현 등 주연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과 함께 송혜진 작가의 섬세한 필력, 조영민 감독의 감성적인 연출이 어우러졌다는 평가다. 박지현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고은이라는 배우가 있었기 때문에 제 연기가 빛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워낙 감정의 폭이 큰 역할이라 연기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야 했는데 바위처럼 묵묵하고 굳건하게 시행착오를 받아준 덕분에 안심하고 연기할 수 있었다”고 했다.
송 작가의 경우 인어공주, 아내가 결혼했다 등 작품을 통해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깊이있는 서사에 강점이 있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조 감독은 지난 2021년 드라마 괴물로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드라마 작품상을 수상하며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조 감독은 은중과 상연이 호평을 받자 감사 인사를 통해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관계를 만나게 된다. 어떤 만남은 선물처럼 마음을 밝혀주고, 어떤 만남은 상처로 남아 오래도록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며 “서툴고 흔들리는 순간조차 결국은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가는 과정의 일부가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완벽히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다”며 “불완전하지만 진심이 깃들었던 그 순간들 덕분에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고, 또 성장해나간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