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전역에서 반전시위로 체포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대 러시아 제재 이전부터 푸틴 정권의 탄압을 피해 미국 망명길에 오르는 러시아인들이 크게 증가했다고 AP통신과 뉴욕타임스(NYT)등 미국 매체들이 보도했다.
NYT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의 엄격한 새 법에 따라 체포될 것을 우려한 언론인과 블로거, 활동가 등이 러시아를 떠났다. 이들은 러시아에 가족과 직장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으며 돈도 은행 계좌에 묶여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며칠 동안 러시아의 독립 언론들을 강제 폐쇄했다. 러시아 인권감시단체 OVD-info는 지난달 24일부터 이날까지 러시아 37개 도시에서 반전 시위에 참가한 1만4000여 명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아르메니아에는 매일 수천 명의 러시아인들이 도착하고 있다. 다부르 도르자이르(25)는 러시아 국영 스베르방크의 변호사직을 그만두고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으로 왔다.
AP통신이 소개한 러시아의 재야 활동가 막심 데르치코의 경우는 블라디보스톡에서 14세의 딸을 데리고 무작정 멕시코로 건너와 국경도시 티후아나 세관을 거쳐 미국에 입국한 경우이다.
그는 다른 7명의 러시아인들과 함께 승용차에 타고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차와 미국에 입국해 망명을 신청할 수 있는 기회 사이에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차량 대열을 정리하기 위해 중간에 서 있는 미국 경찰관 뿐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AP통신에게 ” 그 때의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미지의 순간, 공포, 정말 피를 말리는 평생 최악의 힘든 순간이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일생을 건 도박은 성공했다. 데르치코는 하루 동안 구금된 후에 딸과 함께 석방되어 망명신청을 할 수 있었고 최근에 똑같은 루트를 통과한 수 천명의 러시아인의 대열에 합류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고 미국과 동맹국들이 러시아에 제재를 시작하기 전부터 미국에는 러시아 망명자들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지난 해 8월부터 올해 1월까지 멕시코에서 미국 국경을 통과한 러시아 망명자들의 수만도 8600명대, 전년도 같은 기간의 249명에 비해서 35배나 늘어났다. 그들 10명 중 9명은 샌디에이고에서 공식 국경 통과증을 가지고 입국한 사람들이다.
앞으로는 구 소련 소속 다른 국가들의 이민들도 러시아인 보다는 적지만 같은 루트를 통해 밀려들 것이며, 특히 우크라이나인들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미 이민관리들은 예측하고 있다.
미국은 전에 두 번이나 입국을 거부했던 우크라이나의 4인 가족을 지난 10일에 인도주의적인 이유로 입국허가했다.
러시아인들은 미국인과 달리 멕시코에 갈 때에는 입국사증(비자)가 필요없다. 따라서 많은 러시아인들은 모스크바에서멕시코의 칸쿤으로 관광객을 가장해 입국한 다음 티후아나로 가서 돈을 모아 차량을 사거나 렌트해서 되도록 여러 명이 함께 타고 입국한다.
이들이 샌디에이고의 샌이시드로 국경관문에 도착할 때 쯤엔 매일 3만대씩 몰려드는 미국입국 차량이 끝없이 밀리면서 이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도달한다.
국경 관문에는 고속도로 차선 처럼 노란색으로 그려진 차선이 24개나 있고 이를 통과해야 입국심사 초소에 도착한다. 초소의 부스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완충지대와 방지 턱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방지턱의 완충지대를 지나야 미국 땅에 들어가지만, 멕시코 쪽을 지키고 있는 미국 관리들은 일단 이민 차량을 멈추고 차량내부를 조사하고, 탑승자들의 여행관련 서류를 심사하고 수상한 차량들은 통과시키지 않고 멈추게 한다.
지난 8월 이 곳을 통과한 한 러시아인은 로스앤젤레스에서 AP통신과 인터뷰하면서 ” 그 순간이 우리가 겪은 최악의 공포의 순간이었다. 아이들도 함께 타고 있었는데 모두가 걱정이 되어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러시아인들은 소셜미디어와 전화문자를 통해서 자신의 국경 통과 경험담을 무수히 올려놓고 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을 떠나서 샌디에이고의 호텔방에 오기까지 멕시코 시티와 칸쿤을 거친 사진을 올린 사람도 있다.
티후아나에서 대담하게 중고차를 사서 끌고 샌디에이고에 도착한 그는 이틀동안의 수용소 생활 외에는 겁낼 만한 일은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후 트럼프시대의 극단적 이민방지 정책을 대부분 폐기하거나 번복했지만, 국경지대에서는 아직도 이민 심사의 까다로운 과정들이 남아있다.
러시아 망명객들 대부분은 사막과 산악지대를 건너서 들어오는 불법이민 루트 보다는 공식 입국 관문을 차량을 타고 통과하는 쪽을 선호한다.
간혹 불법이민 알선업자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여정을 소개하는 ‘소개인’을 쓰는 경우가 많다고 샌디에이고의 국토안보부 특별 요원인 채드 플란츠는 말했다.
모스크바-칸쿤의 비행노선이 가장 흔한 루트이긴 하지만, 일부 러시아인들은 암스테르담이나 파리에서 멕시코 시티로 날아와 다시 티후아나로 간다고 플란츠는 설명했다.
하지만 국경관문에서 밀리는 수많은 차량들간의 추돌이나 접촉 사고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지난 12월에는 급정거한 차량 때문에 뒤쪽 차들이 추돌하는 사고로, 운전을 잘못한 러시아 청년이 3개월이나 금고형을 받은 적도 있다. 우크라이나와 타지키스탄에서 온 이민들이 증명서를 요구하는 경찰관으로부터 달아나다가 경찰관 손을 측방 거울로 치면서 단속되기도 했다.
샌디에이고 연방지법원은 일단 망명을 위해 도착한 이민을 막는 것은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린 적 있지만 특별한 대안은 제시하지 않아서 단속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민들을 돕는 시민단체의 에리카 피네이로 회장은 안전지대를 통과하는 이민차량을 막는 미 당국과 멕시코 경찰의 국경단속을 해제하라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샌디에이고에서 러시아 망명자들을 돕는 율리야 파시코바 변호사는 지난 해 러시아의 야당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투옥 이후로 망명객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대개는 푸틴 정권에 반대하는 반정부 인사들, 동성애자, 무슬림들, 러시아 당국이 추방명령을 내린 기업이나 상점 소유자들이 포함되어 있다며 “이들이 생각하는 미국은 여전히 자유, 민주주의, 훌륭한 경제와 부의 상징이다”라고 그는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