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와 정부의 의대증원을 둘러싼 갈등이 악화일로다. 전공의들의 빈 자리를 전임의와 교수들이 메우고는 있지만 의료현장에서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는 호소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암·중증환자 진료 위축과 인력배출 지연은 물론 필수의료를 살릴 골든타임마저 놓쳐 의료체계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17일 의료계에 따르면 현재 전임의와 교수들이 전공의들이 부재한 중환자실과 응급실을 지키고 있지만 절대적인 인력 부족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의대생 유급 조치와 전공의 면허정지 처분 등에 반발하는 교수들의 자발적 사직 움직임이 확산하면서 의료현장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교수들이 사직서를 내더라도 수리되기까지 한 달 정도 소요되고 단계적 진료 축소를 검토하고 있어 의료현장에 당장 큰 혼란이 빚어지진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정부와 의료계의 강대강 대치로 사태가 이달 말까지 지속되면 수술이나 입원 중단까지 초래될 우려가 있어 파국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A 교수는 “외래진료나 수술 중 심폐소생술(CPR) 환자가 발생할 수 있어 응급·중환자 진료 축소가 불가피한 상황”이라면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공의 없이 근무해온 전문의들의 진료 패턴을 배울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이 복귀하지 않게 되면 향후 전문의 배출에도 제동이 걸리게 된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11일까지 면허정지 행정처분 사전통지서를 발송한 미복귀 전공의는 5556명이다. 최소 3개월 간 면허가 정지되는데, 전공의 수련은 1년 단위로 이뤄지기 때문에 올해 수련기간을 채우지 못해 전문의 취득이 1년 이상 늦춰질 수 있다. 전문의 배출 시점이 뒤로 밀리면 군의관, 공보의 배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현재 의대생들이 대거 수업을 거부하거나 휴학 신청을 하고 있어 내년에는 졸업생이 배출되지 않아 인턴 양성에도 공백이 생길 수 있다. 사직한 일부 전공의들이 군에 입대하거나 일반의가 되면 10년 이상이 흐른 후에는 의대교수 배출에도 영향을 미쳐 기존 교수들의 업무가 가중될 우려도 있다. 의대교수는 보통 진료 뿐 아니라 교육, 연구를 병행한다.
전공의 비중이 높은 대학병원, 특히 상급종합병원은 인력 부족으로 입원·수술 환자를 크게 줄인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면 암·중증·희귀 난치질환 등 고난도 진료라는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워질 우려가 있다. 전공의는 입원환자 관리는 물론 수술 준비와 보조, 작은 수술 집도 등 많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 전공의 부재로 직격탄을 맞은 ‘빅5’ 병원 등 상급종합병원들은 하루 수십억 원의 적자를 보는 등 경영난을 겪고 있다. ‘빅5’ 병원은 전체 의사 중 전공의 비중이 약 40%에 달한다. ‘빅5’ 병원인 세브란스병원 등을 산하에 두고 있는 연세대의료원은 전공의들이 떠난 지 한 달이 다 돼 가면서 수익이 21% 가량 감소하자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했다.
전공의 비율이 각각 40%, 30%를 웃도는 경희대병원과 강동경희대병원을 산하에 두고 있는 경희대의료원도 “전시(戰時)에 준하는 상황”이다. 현재 두 의료기관은 병상가동률이 50% 아래로 떨어졌고, 수익 달성률은 60%대를 기록하고 있다. 서울대병원은 마이너스 통장 한도를 1000억 원으로 늘렸다.
의대생들이 대거 유급 조치 되거나 휴학에 들어가면 내년부터 의대 교육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 정부가 내년에 의대 2000명 증원을 밀고 나가면 한 해 5000명의 신입생이 생기는데 유급 됐거나 휴학했던 의대생들이 복학해 함께 수업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수련병원은 인턴·레지던트 정원이 한정돼 있어 향후 원하는 병원에서 수련을 받기도 어려워질 공산이 크다.
특히, 이번 사태로 전공의들이 미래 필수의료 분야에서 일하면 성장 가능성이 없다는 인식이 확산해 위기에 놓인 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 등 필수의료가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질 수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대한내과학회는 지난 14일 호소문을 내고 “올해 649명의 신입 전공의 중 1명도 수련을 시작하지 못했고, 심지어 2~3년차도 거의 대부분 병원을 떠났다”면서 “향후 4년간 내과 전문의를 배출할 수 없게 되면 필수 의료가 황폐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내과는 중환자와 응급환자를 치료하기 때문에 필수의료의 마지막 보루로 불린다.
유인술 대전응급의료지원센터장은 “향후 갈등이 봉합된다 하더라도 전공의들이 안 돌아올 것 같아 그게 제일 큰 걱정”이라면서 “앞으로 필수의료를 해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 진짜 그만 둘 생각으로 나간 것이여서 교수들도 설득이 안 된다. 접촉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강압적인 조치로 일관하면서 의사는 사직도 못하고 군대도 못가고 해외여행도 못가는 노예라는 인식을 심어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업무개시명령 등 정부의 강압적인 조치와 압박, 의사에 대한 적대적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전문의가 되기 싫다는 것이다.
허대석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전공의들이 사직 후 정부의 수많은 대책 발표에도 진료현장으로 돌아오는 전공의는 늘어나고 있지 않다”면서 “폐암 가능성이 높은 환자에게 제대로 된 검사도 없이 증세에 기반한 현상학적 진단을 하고, 증세 완화제만 처방하겠다는 정부를 더 이상 믿고 따를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객관적인 근거에 바탕을 둔 원인적 진단이 전제돼야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올 수 있다”면서 “정부가 논리적으로 납득할 만한 정책을 제시해야 진료현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짚었다.
정부가 전공의 부재로 의료공백이 커지는 이번 같은 사태를 막겠다며 내놓은 의료개혁도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상급종합병원을 기형적인 전공의 중심에서 전문의 위주로 바꾸겠다고 했지만, 전공의보다 인건비가 비싸고 근무시간은 짧은 전문의를 확보하려면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 재정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은 국민이 건강보험료를 더 내야 한다는 얘기다.
특히 이번 사태로 환자와 의사 간 신뢰에 금이 갔다는 점에서 ‘K의료’의 미래가 더욱 어두워졌다는 진단도 나왔다. 의료기관 내 의료행위는 환자와 의사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유 센터장은 “정부는 대학병원에서 필수의료에 몸 담으며 고생하는 전공의들에게 ‘악마 프레임’을 씌워 의료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의사와 환자 간 신뢰를 깨뜨려 버렸다”면서 “전공의가 복귀해도 과거 환자를 진료하던 마음으로 임할 수 있을까. 의대증원 규모를 넘어 환자와 의사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가장 큰 잘못이고 의료발전을 저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도권의 한 대학병원 신경과 A 전공의는 “이번 사태의 결론이 어떻게 나던지 국가차원에서 개인의 신변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환자와 보호자가 되어 나를 찾아올 수 있는 국민이 의사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명확히 알게 됐다”면서 “바이탈 전공의는 안 돌아간다. 의료선진국은 끝났다”고 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번째로 적지만 의료서비스의 질은 높은 편이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대부분 수주에서 수 개월 진료를 대기하는 OECD 국가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대부분 당일(명의 진료대기 제외)에 진료가 가능하다. 치료가능사망률(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사망한 환자의 수를 평가하는 지표)도 스위스에 이어 2번째로 낮고, 국민 1인당 연간 의사 진료 횟수도 14.7회로 OECD 1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