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과 미국이 환율정책 합의문을 공식 발표했다. 정부는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양국이 긴밀히 협의한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전문가들은 미국이 수면 아래에서 원화 절상 압박을 이어갈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한국이 기대해 온 한미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은 쉽지 않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미국이 일본·스위스에 이어 한국과도 환율 합의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개별 국가를 대상으로 한 ‘제2의 플라자 합의’가 이어질 거라는 우려도 나온다.
“시장개입 자제·정보공유” 재확인…’안정’ 문구 포함
5일 기획재정부와 미 재무부는 지난 1일 ‘자국 통화 가치를 경쟁적으로 조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며 환율정책 합의문을 발표했다.
합의문에는 정부 투자기관의 해외투자는 위험조정·다변화 목적에 한정하고, 과도한 변동성에 대한 대응을 제외하고는 달러 매입을 통한 인위적인 환율 조정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더불어 분기별로 공개하던 시장개입 내역을 앞으로 월별로 비공개를 전제로 미국에 공유하고, 연도별 외환보유액 통화구성도 대외 공개하기로 했다.
특히 이번 합의에는 한국 정부의 요구로 ‘안정(stability)’ 문구가 포함됐다. 일본과 스위스의 합의문에는 없는 문구로, 외환시장에 불안이 발생했을 때 협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향후 미국에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을 요구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더불어 이번 합의로 한국은 다음달 발표될 미 재무부 환율보고서에서 ‘환율조작국’ 지정 우려를 해소했다는 게 정부의 평가다. 현재 한국은 조작국 전 단계인 ‘관찰대상국’ 지위에 머물러 있다. 경상수지 흑자 GDP 대비 3% 이상, 대미 무역흑자 150억 달러 이상 등 정량 요건을 충족하고 있어서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9월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주유엔 대한민국대표부에서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과 면담하고 있다.(사진 : 기재부 제공) 2025.9.25.
그러나 한미 상설 스와프 체결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한국이 기대한 안전판은 확보하지 못하고 미국이 원하는 메시지 재확인에 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최근 뉴시스 등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전례를 보면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이 쉽지는 않다”며 “설사 스와프가 체결돼도 다른 협상 조건이 맞아야 관세협상도 타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이번 합의가 단순한 원칙 재확인을 넘어 원화 절상 압박의 포석이 될 거라고 분석했다. 물밑에서는 달러 약세를 유도하기 위한 통화협정이 진행될 거라는 거다. 미국이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개별국을 상대로 압박하는 ‘제2의 플라자합의’의 시작이라는 분석이다.
김광석 한양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는 “공개 합의문은 시장개입 자제와 정보공유 등 이미 하던 것의 재확인에 불과하다”며 “통화스와프 없이 합의만 발표한 것은 달러 약세 유도와 상대 통화 강세 압박을 위한 신호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985년 플라자합의는 다자간 공조를 통한 달러 약세 유도였다면 이번에는 개별 국가를 대상으로 한 일방적 접근인 제2의 플라자합의가 시작된 것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한미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이 불가능하다면 과거와 유사한 적정한 규모의 통화스와프라도 체결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한미 통화스와프를 여전히 제안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상설 통화스와프가 어려우면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와 2020년 팬데믹 때 처럼 적정한 규모의 한시적 통화스와프라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한미의 세부적인 통상 협상이 지연되는 가운데 원·달러 환율은 원화 약세 흐름을 이어가며 1400원대을 중심으로 불안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3500억 달러 대미투자가 어떻게 집행되는지에 따라 한국의 외환 건전성에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