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범인을 ‘제일 긴급 수배자’로 뒤쫓았던 은행강도 사건이 52년 만에 해결됐다. 범인은 이미 사망한 뒤였는데 그의 신문 부고가 범인 추적 및 확정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다.
즉 범인이 죽어서 가족들이 부고를 냈기 때문에 사건이 해결될 수 있었던 묘한 케이스다. 관련 수사 당국은 드넓은 미국 전역에 걸쳐 범인의 행적에 관한 단서를 많이 축적하긴 했지만 부고를 보고서야 자신들이 반세기 넘게 쫓던 진범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1969년 7월10일 금요일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에서 전문제 대학을 갓 졸업한 20세의 은행 창구 직원 씨오도어(테오) 존 콘래드는 마감 직전에 금고에 가 21만5000달러를 빼내 종이 봉투에 넣고 유유히 퇴근했다.
은행은 이틀 후인 월요일 아침에 현재 시세로 170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 강도당한 사실을 알았고 존 콘래드가 출근하지 않자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즉시 그를 뒤쫓았지만 죽을 때까지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지 못하다가 사건 장소로부터 1000㎞ 넘게 떨어진 매사추세츠주의 한 신문 부고를 보고서야 범인이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존 콘래드는 5월에 사망했으며 이 오하이오 은행강도 사건을 발생 때부터 추적하고 있던 연방마샬서비스는 사건 해결을 12일(금) 언론에 알렸다. 연방 판사 보호, 연방 형사피고인 수송 및 증인 보호 등의 사법집행 기관인 마샬서비스 측은 이때 신문 부고의 핵심 역할 및 대를 이어 재직하던 요원 부자가 2대에 걸쳐 집요하게 추적해서 사건 해결에 큰 공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범인 존 콘래드가 이름을 바꾸고 어디 먼 곳으로 숨어 살 것으로 다들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은행 직원들은 지문 채취도 안 했다고 한다. 마샬서비스 수사관들은 실마리 단서를 쫓아 캘리포니아, 텍사스, 오리건 및 하와이 등을 뒤졌지만 허탕이었다. 뒤에 가족을 만나 알게 된 것이나 콘래드는 이름을 토마스 랜델리로 바꾸고 수도 워싱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간 뒤 다시 매사추세츠 보스턴 교외로 동진해 성공적으로 가명 인생을 살았다.
거기서 랜델리는 골프 프로와 고급 중고차 딜러로 일하면서 결혼해서 애도 낳고 지역 경찰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런 뒤 올 5월 페암으로 73세로 죽는 임종 자리에서 자신의 범행과 실제 이름을 가족에게 고백했다.
부인과 자녀 유족은 경찰에 알리지 않고 고인의 부고를 흔히 하듯 지역신문에 유료로 냈다. 물론 가명을 바탕으로 했다. 뉴욕 타임스는 마샬 서비스가 이 부고를 언제 단서로 인식하게 된 것인지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소읍의 한 부고 기사에 난 몇 가지 숫자와 고유명사를 보고 이상한 감을 잡은 아들 수사관은 그간의 단서들과 이것들을 맞추어갔다.
드디어 52년 전의 존 콘래드가 5월에 죽은 토마스 랜델리라고 확신하게 된 아들 수사관이 고인의 집에 노크했다.
유족들은 랜델리가 죽은 자리에서 범행을 고백했음을 밝혔다. 엘리어트 란 성의 마샬서비스 수사관 부자 2대가 계속해온 추론이 사실로 맞은 것이다. 미국서 은행 강도는 소추 시효기간이 없는 중죄인데 마샬 서비스는 경찰에 사실을 알리지 않는 유족은 처벌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한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유료로 신문 란을 빌려 사망 소식을 주변에 알린 부고에서 수사관의 눈에 띈 것은 햇 수는 2년 터울이 있지만 날짜가 같은 생일, 고인의 부모 성명, 졸업한 대학 이름 및 출생지였다.
범인을 특정하는 데 하나같이 중대한 단서지만 마샬 서비스가 어떻게 해서 보스턴 인근 조금만 도시의 지역신문에 난 부고기사를 보게 된 것인지는 공개하지 않아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