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 무장반란을 일으켰던 러시아 민간용병기업 바그네르(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23일(현지시간) 탑승 중이던 항공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러시아 항공당국은 프리고진이 해당 항공기 탑승자 명단에 있었으며 그가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프리고진 탑승 전용기, 모스크바 외곽서 추락…”10명 전원 사망”
외신들에 따르면 프리고진은 현지시간으로 이날 오후 6시께 전용기 엠브라에르(Embraer)-135 레거시 600을 타고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중 트베르 지역 쿠젠키노 마을 인근에서 비행기가 추락해 숨졌다.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300㎞ 떨어진 곳이다.
러시아 연방항공교통청은 “승무원 3명을 포함, 탑승자 10명 전원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이 비행기엔 발레리 체칼로프와 드미트리 우트킨, 세르게이 프로푸스틴, 예브게니 마카랸, 알렉산드르 토트민, 니콜라이 마투셰프 등이 함께 타고 있었다. 체칼로프는 미 재무부가 “프리고진을 대신해 러시아 군수품 수송을 용이하게 했다”면서 제재 대상에 올렸던 인물이다. 우트킨은 바그너를 공동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프리고진의 신임을 받는 부관이다.
초기 조사 결과 사고 현장에선 시신 8구가 발견됐다. 그러나 러시아 항공당국은 프리고진이 이 비행기에 실제 탑승해 있었고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공유된 영상에서 추락한 비행기 꼬리 부분엔 프리고진이 이전에 사용한 제트기와 꼬리 번호(RA-02795)와 일치하는 표식이 있다.
“30초 만에 수직 낙하…추락 전 이상 징후 없었다”
사고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친(親)바그너 소셜미디어 채널은 항공기가 방공망에 격추됐다고 주장했으나, 러시아 당국은 공식적으로 이를 확인하지 않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비행기가 미사일에 맞아 날개 한쪽을 잃은 뒤 추락했다”고 했다.
다만 플라이트레이더24는 항공기에서 송신된 정보 분석 결과 “마지막 30초 만에 수직 낙하하기 전 이상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기체 결함이나 날씨 등에 의한 추락 사고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으로 해석된다.
플라이트레이더24에 따르면 위치 정보는 현지 오후 6시11분께 끊겼다. ‘해당 지역 무선 간섭 및 전파 방해(interference/jamming in the area)’ 때문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항공기는 이후에도 9분 동안 다른 데이터들을 전송했다. 고도와 수직 속도, 자동 조종 설정과 같은 데이터다.
플라이트레이더24는 “비행기는 약 8.5㎞ 상공에서 수평을 유지하면서 약간의 고도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사용 가능한 데이터에서 항공기는 마지막 순간 불규칙한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고 한 지점에선약 9.1㎞까지 올라갔다”면서 “그러다 오후 6시19분께 고도 데이터마저 전송이 중단됐다. 직전 항공기는 분당 약 2.4㎞에 가까운 속도로 극적으로 하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데이터는 비행 마지막 순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건 그것은 매우 빠르게 일어났다. 극적으로 추락하기 전 항공기에 문제가 있다는 징후는 없다”고 분석했다.
AP통신은 비행기가 추락하는 영상을 분석한 결과 “항공기가 큰 연기 구름에서 돌처럼 떨어지며 격렬하게 뒤틀렸다”면서 “이것은 항공기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을 때 보이는 현상”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2개 영상을 프레임별로 분석하면 비행 중 일종의 폭발을 일으킨 현상과 일치한다”면서 “해당 사진엔 이미 비행기 날개가 없는 것이 보인다”고 덧붙였다.
🚨🇷🇺 Russian air defences caught on camera shooting down private jet belonging to Wagner Leader Yevgeny Prigozhin over Tver region.
Pretty clear message from Putin. pic.twitter.com/DAOcz16yr4
— Concerned Citizen (@BGatesIsaPyscho) August 23, 2023
러시아 당국은 조사에 착수했다.
러시아 항공당국은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전문가를 투입해 블랙박스를 분석하는 한편 승무원 훈련, 항공기 기술적 결함, 비행 경로 기상 상황, 지상 무선 장비 점검 상황 등에 대해서도 확인할 방침이다.
러시아 수사위원회도 교통안전 및 항공운송 운영 규칙 위반에 관한 러시아 형법 제263조에 따라 형사 사건을 개시했다.
무장 반란 딱 두 달 만…푸틴, 일언반구 없어
공교롭게도 사고가 난 이날은 프리고진이 지난 6월 23~24일 무장 반란을 일으킨 지 딱 두 달째 되는 날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작전을 주로 수행하는 러시아 남부군관구가 위치한 로스토프나도누를 무혈 장악했고, 곧바로 북진해 수도 모스크바 남쪽 200㎞까지 진격했다.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그를 “반역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중재로 반란을 하루 만에 접었고, 푸틴 대통령 용인 하에 벨라루스로 본거지를 옮겼다. 프리고진은 이후 러시아와 벨라루스, 아프리카 등지를 자유롭게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정확한 날짜와 장소가 적시되지 않은 영상을 텔레그램에 올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변 안전에 대한 우려는 꾸준히 제기돼 왔다.
비록 푸틴 대통령이 안전 보장을 약속했다지만, 반란 사태로 푸틴 대통령 체면을 구긴 데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현재 진행 중이어서 이런 항명을 허용하는 것을 보여줘선 안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과거 푸틴 대통령의 정적들이 독살 등 석연찮은 의혹으로 하나 둘씩 사라졌던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 때문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의 정적들이 여러 차례 독살 시도를 당했던 전례가 있었다는 점에서 지난 7월 “그는 자신의 안전을 걱정해야 한다. 내가 프리고진이라면 먹는 것을 조심하고, 내 메뉴를 감시할 것”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프리고진 사망에 대해 일언반구 안 했다.
푸틴 대통령은 사고 3시간여 후인 현지 오후 9시께 쿠르스크 승전 8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 중이었다. 이 행사는 국영TV를 통해 중계됐다. 같은 시간대에 프리고진의 사망 소식도 나왔다.
푸틴 대통령은 기념식에서 우크라이나 참전 군인들에게 국가상을 수여했다. 그는 “조국에 대한 헌신과 군 맹세에 대한 충성심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특별군사작전 모든 참가자들을 단결시킨다”고 연설했다.
미 당국자들, ‘푸틴 배후설’ 배제 안 해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보고를 받은 뒤 푸틴 대통령이 배후에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기억하겠지만 ,나는 이와 관련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오늘 ‘탈 것’을 조심하겠다고 말하겠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관계는 모르지만 (프리고진의 사망 소식이) 놀랍지는 않다”고 말했다. 독살 대신 의도된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했음을 시사한 것이다. 다만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에서 푸틴 대통령 모르게 벌어지는 일은 많지 않지만 나는 그 답을 할 만큼 충분히 알고 있지 않다”면서 확정적으로 단언하진 않았다.
또 다른 미 당국자도 “푸틴 대통령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킨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면서 배후설을 제기했다. 이 당국자는 백악관은 프리고진이 무장 반란에 실패한 뒤 결국 제거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고 덧붙였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프리고진이 확실하게 사망한 것인지 확인하지 않았지만, “우린 보고를 받았다. 확인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미 국방장관과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낸 리언 패네타는 CNN에 이 사건 이후 “러시아 당국이 바그너 그룹을 인수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보좌관은 “프리고진 제거는 푸틴 대통령이 자신의 짐승 같은 테러를 위해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한편 일각에선 프리고진이 사망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푸틴 정권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 사망한 것처럼 꾸민 자작극이란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