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80세의 나이에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좀처럼 언론에 나서지 않는 그가 뉴욕타임스(NYT)와 1시간 동안 화상인터뷰를 했다. 서방언론과 인터뷰는 2014년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통역을 두고 이뤄진 1시간짜리 인터뷰에서 많은 것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NYT는 인터뷰를 계기로 22일 미야자키감독의 작품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다음은 기사요약.
미야자키 감독은 애니메이션 제작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던 시기에도 캄퓨터를 사용한 제작을 한사코 거부했다. 1988년작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두 어린이의 우정과 숲속의 괴물을 그린 장면은 물론 1997년작 “모노노케 히메(일명 모노노케 공주)”의 주인공이 자기를 길러준 어머니 늑대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빨아먹는 장면, 2001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겁쟁이 소녀가 용기를 내 돼지로 변한 부모를 구하는 장면까지 미야자키 감독은 극단의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휙휙 눈이 돌아가는 장면들을 거의 전적으로 손으로 그려냈다.
특히 미야자키와 유일하게 견줄만한 애니메이션 작가인 월트 디즈니와 달리 미야자키는 80살이 된 지금도 기업 운영자로 물러 앉지 않았다. 그가 영화감독 다카하타 이사오, 제작자 스즈키 도시오와 함께 1985년에 설립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그는 애니메이션 생산에만 몰두하는 수백명과 함게 팀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다. 때로는 동작을 직접 그리고 배경작업도 하며 청소도 하는 예술가중 한 사람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 책상과 크기가 비슷한 그의 책상은 수십년 동안 똑같은 일을 반복해온 현장이다. 그는 여전히 영화 한 편당 수만쪽에 달하는 장면을 직접 그리고 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는 “애니메이터의 도구는 연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본제 연필이 특히 좋다면서 연필심이 섬세해 표현을 잘 해낼 수 있다고 했다. 스나다 마미 감독 2013년작 “꿈과 광기의 왕국”에서 그는 자신이 늙어서 5B 연필이나 6B 연필을 쓴다고 자조하면서 연필을 만드는 일본 삼나무에 대해 “질 좋은 나무들이 다 없어졌다”고도 했다. 미야자키 감독은 인터뷰에서도 “그건 사실”이라면서 웃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모노노케 히메”에서 마을 지도자 에보시가 수천년된 이끼덮인 삼나무들을 잘라서 대장간에 불을 지피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미야자키 감독이 남부 야쿠시마섬 시라타니 운시쿄 협곡으로 현지촬영을 나갔던 일이 생각났다. 그곳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25m 높이에 둘레가 16m가 넘는 2600년 이상된 나무들이다. 미야자키 감독은 그러나 운시쿄 협곡의 숲이 영화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면서 “옛날부터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숲을 묘사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인터뷰에 응한 장소는 도쿄 교외 코가네이에 있는 작은 건물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개인 작업실로 사용하는 그곳을 그는 “돼지 우리”라고 불렀다. 돼지를 좋아하는 그는 스스로를 돼지로 그리는 일이 적지 않았다. 건물 앞에 세워둔 어두운 회색의 시트로엥 2CV는 2마력짜리 엔진이 달린 컨버터블로 1990년에 단종된 모델이다. 1979년작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벼랑끝에서 추격전을 벌리는 와인색 모델로 등장한다. 매년 12월이 되면 부엌 창가에 1970년대 TV 시리즈로 방영된 “하이디: 알프스의 소녀”에 나오는 끌어안고 싶게 만드는 염소 인형을 놓아 둔다. 지나다니는 아이들을 위해서다. 아카데미 박물관이 이 염소를 전시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한다며 거절했었다.
미야자키 감독은 ‘돼지우리’를 은퇴 후에도 계속 사용할 계획이다. 1998년 더이상 작품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지은 이 건물은 이듬해 지난해 가을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 열차” 이전 일본 역사에서 가장 많이 돈을 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아이디어를 내면서 스튜디오 지브리에 반환됐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서방 이외 지역 영화로는 처음으로 2002년 아카데미상 최고 애니메이션영화상을 받았다. 2013년 34년 동안 11편의 영화를 만든 그가 두번째로 은퇴선언을 하면서 스튜디오 지르비는 생산부서를 폐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도 이곳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하고 싶어서”라고 이유를 말하며 그는 마치 마지막 도둑질을 하려고 준비중인 머리가 하얗게 센 도둑처럼 웃었다.
미야자키 감독은 서스펜스의 대가다. 물 흐르는듯 하면서도 대충 그린 듯한 선과 세부 묘사는 시간을 많이 들여 제작하는 주류 애니메이션과 다르지만 그의 영상 스타일은 보는 사람이 단숨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밝지만 천박하지 않은 채도높은 색을 차가운 회색, 회갈색과 대비시킨다. 빛과 그림자를 가르는 은빛, 깊은 밤을 묘사하는 그림자 속의 그림자 같은 것들이 그만의 특징이다.
미야자키는 리얼리스트이기도 하다. 2004년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끝부분에 등장하는 비행선의 폭격장면은 검은 연기와 타오르는 불꽃, 붉게 물든 하늘이 등장한다. 이는 미야자키가 전쟁에 대해 가진 기억을 그려낸 것이다. 그는 일본이 진주만공격으로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1941년생이다. 그가 네살이던 해 그의 가족들이 도쿄에서 피신해 지내던 우츠노미야를 미국 폭격기들이 폭격했다. 그는 그때의 기억을 “꿈과 광기의 왕국”의 한 장면으로 그려냈다. 소이탄이 쏟아지는 속에서 아버지가 그를 업고 강둑을 기어올라 작은 트럭을 타고 도망쳤다. 미야자키는 영화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트럭에 타도 되느냐고 묻는데 트럭이 그냥 떠나버리는 것으로 묘사했다. 미야자키는 실제로 그들을 두고 떠났었다고 했다. 한달 뒤 미국이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했고 일본이 항복했다. 어렸던 미야자키가 당시 상황의 위중함을 제대로 알진 못했을 지라도 당시의 기억이 그의 작폼에 짙게 배어 있다. 타계한 화가 이케다 타츠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등 동시대의 일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실제로 괴물과 수퍼 히어로가 등장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부상은 원자폭탄의 낙진으로 유전 변이가 발생하는 상황을 많이 그리고 있다. 1954년 등장한 고질라는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 때문에 심해에서 성장한 괴물이며 1963년 TV 시리즈로 방영되기 시작한 우주소년 아톰은 영웅주의를 표상한다. 원자력에서 동력을 얻는 소년 로봇이 평화를 위해 싸운다는 설정이다.
미야자키의 영화들은 또 쇄국하던 일본이 강제로 서구의 가치관을 받아 들여야 했던 근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번 인터뷰를 중개한 로스앤젤레스 아카데미 박물관의 니벨은 미야자키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옅은 애절함을 간직한 열망이 제국주의시대의 자부심과 서구 물질주의를 모두 경원하는 나이든 일본인들의 향수를 자극한다고 말한다.
미야자키의 아버지는 가미가제 공격으로 악명높은 제로 전투기의 날개를 생산한 무기공장을 운영했다. 결코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었다. 1995년 아사히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미야자키 감독은 아버지가 결함있는 제품을 눈감아달라고 관리들을 뇌물로 구워삼는 사기꾼으로 묘사했다. 전쟁이 끝나자 아버지는 남은 두랄루민으로 조잡한 숟가락을 만들어 가재도구가 없어 고생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팔았다고 했다. 뒤에 공장을 댄스홀로 만든 적도 있었다. 미야자키는 네 아들 가운데 둘째였다.
미야자키는 아무나 드나들 수 없었던 군수공장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어릴 때부터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는 비행기에 심취했다. 리비아 사막에 부는 뜨거운 모래바람을 뜻하는 지르비(영어로 Ghilbi)는 2차대전에 사용된 이탈리아 정찰 겸 폭격기의 이름이기도 하다. 항공기에 매료된 흔적이 미야자키가 만든 모든 영화에 나타난다. 하늘을 날거나 하늘을 걸어다니는 괴물로 변하는 사람이나 1986년작 “천공의 라퓨타”에 등장하는 반투명 날개로 비행하는 비행물체처럼 말이다.
미야자키는 성장하면서 아버지가 전쟁을 통해 돈을 벌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 것이 잘못임을 깨닫게 됐다. 그는 1995년 “나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라고 고백했다. 영화제작자로서 그 자신도 영상을 만들어내지만 영상이 마구 만들어지는 것을 비난하고, 자식을 사랑하지만 보살피지 못하며, 담배를 끊지 못하는 환경론자라는 식으로 말이다. 모순을 끌어안는 이같은 태도가 서방에서 그의 작품이 인기를 끈 비결인 동시에 그에 대한 거부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선악을 분명히 구분하지 않는 태도는 일신론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나는 옳고 그른 것을 판정하는 신이 아니다”라면서 “우리 인간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의 세상에선 분명한 악당이 없으며 다만 나쁜 일을 하는 역할만 있을 뿐이다.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마을 지도자 에보시는 숲을 파괴하지만 동시에 몸파는 사람들과 문둥병 환자들을 위한 구호소를 만들기도 한다.
디즈니 영화에 대해 미야자키는 1988년 한 강연에서 디즈니의 가벼운 정서를 싫어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디즈니의 영화가 관객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미야자키의 작품에는 남자 주인공보다 여자 주인공이 더 많이 등장한다. 대부분 어린이도 아니고 여인도 아닌 어중간한 나이의 소녀들이지만 아는 게 많고 독립적인 인물이다. 스스로 직업을 택하고 집안을 이끌며 전투를 벌이고 소년들을 구해낸다. 동화속 낭만적인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다.
미야자키 감독은 겸손한 세속의 성자와 같은 삶을 살아왔다. 일을 통해 이웃에 사는 아이들에게 기쁨을 주려하고, 쉬는 날은 강가의 쓰레기를 줍고, 20년 넘게 자기 집 근처 요양원에 있던 나환자를 남몰래 보살피고, 친구가 된 나환자가 숨질 때 손을 잡아 줬다.
그런 그에 대해 미야자키의 멘토이자 경쟁자였던 다카하타는 “싸우기도 잘하고 울기도 잘하고 놀기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재능을 인정해주길 기대하며 기대가 깨지면 불같이 화를 내던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미야자키는 또 한사코 일본의 재무장을 반대해 온 탓에 일본 우익들로부터 지독하게 공격을 당하고 있지만 컴퓨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쟁 중 무기를 만들어 부자가 된 아버지 덕분에 미야자키 감독은 넉넉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일본 귀족들이 주로 다니는 가쿠슈인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의 성장기는 일본의 격변기였다. 전통 농업에서 중공업으로 경제가 발달하면서 발전 속도가 눈부셨다. 일본의 산업화 이론을 공부하면서 미야자키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주동자는 아니었지만 1960년대 미일안보조약 반대시위에 가담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만화를 그리기 시작해 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 최대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토에이에 취직해 곧바로 애니메이터 노동조합의 사무총장이 됐다. 1994년 “출생 계급과 무관하게 바보는 여전히 바보고 좋은 사람은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는 말로 공산주의와 결별했음을 밝혔다. 그는 “모든 세상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철학자는 없다”고 말했다.
미야자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념성이나 도덕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작업은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일상 사이의 빈 자리를 채워줌으로써 위안을 제공하는 것”이 사명이다. 다만 그의 작품들은 인간이 환경에 미친 파괴적 영향을 개탄한다. 모든 사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일본 신도(神道)의 영향이 엿보인다.
또 운명론과 낙관론이 묘하게 교차하는 것도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모노노케 공주가 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죽지만 숲은 계속 살아 남는다. “나로선 울창한 숲이 나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한 어둠과 연결돼 있다”고 미야자키는 1988년의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숲이 사라지면 내 영혼 속의 어두움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내 존재도 희박해지는 셈”이라는 것이다.
미야자키는 그러나 자연을 순수한 것으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에 등장하는 곰의 신이 총을 맞자 화가나서 아시타카 왕자의 마을을 공격한다. 이 때도 아시타카는 그를 죽이려 하기 보다 떠나달라고 애원한다. 미야자키는 인터뷰에서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에 본 적 없는 낮선 것과 마주치면 겁부터 내지 말고 소통해봐야 한다”고.
미야자키는 지금 오랜 동료 스즈키(73)와 함께 다음 작품을 만들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작품에 대해 설명하기를 꺼렸지만 요시노 겐자부로의 1937년작 소설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개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 얼마 안된 열다섯살 장난꾸러기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작품은 소설과는 딴 판인 “대형 판타지물’이라고 스즈키는 밝혔다.
약속한 시간이 끝나자 미야자키 감독은 머리를 문지르며 예의 기다란 세븐 스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마지막 질문을 했다. “다음 작품의 제목이 ‘사는 방법?’인가요?”라고 묻자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걸 모르기 때문에 이 영화를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