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러 패권이 위기에 놓였다.
달러는 미국에 대한 신뢰의 상징이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일관성 없는 관세 정책과 출구 없는 무역전쟁으로 미국에 대한 신뢰가 위협받고 있다. 이런 흐름이 지속된다면 달러의 지배적 지위는 흔들릴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10일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트럼프발 무역 전쟁 이후 투자자들은 주식, 채권, 통화 등 미국 관련 자산을 팔아치우고 있다. 애널리스트들은 “이번 매도세는 미국 경제 자체가 불확실한 베팅이라는 두려움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지난 2일(현지 시간) 관세 발표 이후 이틀간(3~4일) 미국 뉴욕 증시의 시가총액은 6조6000억달러(약 9600조원) 증발했다. 매도세는 미국 국채에까지 번졌다. 일반적으로 주가가 하락하면 상대적으로 안전자산인 채권값이 오르는데 시장 불확실성이 커지자 국채 가격마저 떨어진 것이다.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4월 초 4.1%에 달했는데 이날 현재 4.45%선에 거래 중이다. 이번주 초 4.3%에 거래되던 30년물도 이날 4.9%까지 올랐다. 채권 가격과 금리는 반대로 움직여 매도세가 강하면 가격이 떨어지고 금리는 오른다.
시장이 패닉에 빠지자 트럼프는 상호 관세 발효 몇 시간 만에 이를 ’90일간 유예’하겠다고 선언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트럼프는 지난 9일(현지 시간) 기자들에게 “채권 시장은 아주 까다롭다. 내가 지켜보고 있었다”며 “어젯밤에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걸 봤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그가 시장을 지배한 공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다.
다만 중국은 이번 유예 조치에서 제외됐고, 오히려 중국에 대한 상호 관세는 104%에서 145%로 뛰었다. 또 관세 부과를 잠시 미루는 것일뿐 ‘철회’는 아니기 때문에 유예 조치가 시장에 주는 긍정적 메시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날 미국 뉴욕 증시는 미중 무역 전쟁이 고조되고 있다는 불안 속 다시 폭락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로렌스 서머스는 이번 사태를 ‘수에즈 운하 위기’에 비유했다. 1956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이에 반발해 영국은 이집트에 침공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반대로 철군한 사건이다. 이후 영국은 패권을 잃었고 미국은 세계 경제·정치 주도권을 강화했다.
그는 “그 당시 영국은 기축통화로서 파운드의 위상을 영원히 잃었다”며 “이번에도 미국 자산에 대한 신뢰 저하가 달러까지 번지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일종의 수에즈 모멘트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한발 물러섰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의 일관성 없는 정책, 미국에 대한 신뢰 무너뜨려…”탈달러화 이미 진행 중”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일관성 없는 정책 발표와 번복 속 ‘탈달러화’는 이미 진행 중이다.
달러가 세계의 결제 수단이자 기축통화로 위상을 지켜올 수 있었던 이유는 전 세계가 미국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공화당, 민주당 정권을 막론하고 국제 금융 질서와 법치를 지켜왔는데 트럼프 대통령 취임 첫 100일간 이 원칙들은 도전에 직면했다.
서머스는 “트럼프 행정부는 신흥국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자의적인 경제 정책을 펴고 있다”고 꼬집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서 “각국 중앙은행과 정부의 외환보유고에서 달러의 비중이 지속해서 감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2000년 70% 이상이었던 달러 비중은 지난해 60% 이하로 줄었다. 중앙은행들은 달러 대신 금과 중국 위안화 같은 비전통적 통화를 더 많이 보유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브루킹스연구소는 달러 패권이 도전에 직면한 배경을 ▲경제 제재의 남용으로 달러 기반 거래가 번거로워진 점, ▲미국 부채와 재정 적자 문제, ▲달러 없이 거래할 수 있는 핀테크 기술의 발전 등 세 가지로 꼽았다.
이런 가운데 중국은 자국 디지털 통화를 활용한 국경 간 결제 시스템을 밀어붙이고 있다. 중국은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엠브릿지(mBridge)’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디지털 위안화’를 달러 금융의 대안으로 만들고 있다.
이번 무역 전쟁이 고조될수록 중국은 달러에 대한 도전을 더욱 공격적으로 이어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제문제협의회(CFR) 회장인 마이클 프롬언은 “우리는 국제 시스템의 공동의 적이 되어버렸다”며 “그게 바로 미국”이라며 이 같은 흐름이 지속된다면 달러는 세계 경제에서 지배적 위치를 잃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