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전승절을 계기로 이뤄진 북·중·러 지도자들의 결집은 미국과 서방을 향한 각자의 셈법이 맞물린 결과로 보인다. 서로가 서로를 대외적 카드로 내세우는 모양새다.
김정은, 美와 대화 재개 앞두고 ‘핵보유국 대우’ 노렸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3일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서며 위상을 과시했다. 김 위원장의 방중은 2019년 1월 이후 6년8개월 만인데, 그때도 지금도 시점이 의미심장하다.
2019년 1월 방중 당시 김 위원장은 미국과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와 마주 앉아 정상외교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원론적 합의에 도달한 싱가포르 때와 달리,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은 제재 해제라는 구체적 목표를 세웠다.
이에 2019년과 현재의 방중에 유사점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 위원장의 이번 방중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년의 야인 시절을 거쳐 재집권한 가운데 이뤄졌고, 전임 바이든 행정부에서 전혀 진전이 없었던 북미 대화 기대감도 조금씩 표출된다.
재취임 전날부터 북한을 언급한 트럼프 대통령은 대화 재개 의지를 반복적으로 공개 피력 중이다. 그간 미국과 대화의 창을 닫았던 북한도 최근 김여정 부부장 담화를 통해 새로운 사고를 바탕으로 한 접촉 출로를 언급, 대화 재개 가능성을 열어뒀다.
김 위원장 입장에서 미국과의 본격적인 대화 재개 전에 베이징을 방문해 북·중 관계를 다지려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핵보유국인 중국·러시아 정상과 나란히 선 모습으로 향후 대미 대화에서 핵보유국 대우를 얻어내려는 속내도 엿볼 수 있다.
중국으로 넘어가기 전 차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관련 연구소를 방문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양자 회담에만 집중하던 이전과 달리 세계 여러 정상이 모이는 자리에 발을 들여 다자외교 모습을 연출한 것도 결을 같이 한다.
中, 美 ‘대중국 강경 기조’ 맞서 북·중·러 결속 과시
시 주석에게도 나름의 셈법이 있다. 중국은 올해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서로 고율 관세를 부과하며 무역 분쟁을 치렀다. 현재는 상호 유예로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향후 협상 상황 및 합의 이행 여부에 따라 여전히 불씨는 남아있다.
무역 외에도 군사·기술 측면에서 중국은 최근 몇 년간 미국의 ‘추격하는 위협’으로 강력한 견제 대상이 됐다. 대중국 견제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바이든 행정부를 거치며 미국의 외교 정책에서 일관된 기조가 되어가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 주석이 북한과 러시아 지도자를 대동하고 톈안먼 망루에 선 것은 중국이 미국에 홀로 맞서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더는 세계가 미국이 주도하는 일극 체제가 아니며, 시 주석의 연설대로 “중국은 강권에 굴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나아가 중국 역시 북미 대화 재개 가능성에 대비할 필요를 느꼈을 수 있다. 중국은 이전까지 북한 비핵화에 있어 필수 협력자로 여겨졌고, 미국과 서방은 북핵 해결에 중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을 꾸준히 주문했다.
그러나 향후 북미가 직접 협상을 통해 북핵 해결책을 도출할 경우 북핵 및 이와 관련된 동북아 안보 문제에 관해 중국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 이에 김 위원장과 친분을 과시하며 자국의 영향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피력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북·중·러 삼자 회동을 통해 그간 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이뤄진 북한과 러시아의 양자 밀착을 만회하려는 의도도 읽힌다.
푸틴, 3년의 전쟁 불구 ‘러시아 고립되지 않았다’ 메시지
푸틴 대통령도 이번 전승절 열병식을 통해 얻어갈 것이 많다. 일단 북한·중국을 비롯한 외국 지도자들과 공개석상에 섬으로써 3년이 넘게 이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불구하고 자국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게 됐다.
아울러 미국은 최근 러시아의 전쟁 자금줄로 꼽히는 원유·가스 수입 차단을 목표로 세컨더리 제재에 착수했는데, 푸틴 대통령은 이 와중에 자국산 원유 대표적 수입국인 중국을 보란 듯이 찾았다. 서방의 압박에 맞서 자국의 든든한 우군으로 중국을 내세우는 모양새다.
전승절 행사 참석을 통해 중국과 함께 2차 세계대전 승리의 주역을 자처하고, 그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굳어진 ‘침공 가해자’ 이미지를 희석하려는 의도도 품었을 수 있다.
이와 관련, 워싱턴포스트(WP)는 중국이 전승절을 계기로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기여도를 약화하고 자국과 러시아의 역할을 강조하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알래스카를 찾아 트럼프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당시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오바마 행정부 시절 ‘지역 강국’으로 격하됐던 러시아의 면을 사실상 다시 세워줬다는 비판이 나왔다.
실제 지난달 알래스카 미러 회담에 이어 이번에는 중국에서 시 주석과 나란히 서며 푸틴 대통령은 그간 약화했던 자국의 존재감을 뽐낼 수 있게 됐다.
K-News LA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