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골든글로브(Golden Globes) 시상식이 파행을 맞고 있다. 지난해 터진 부패 스캔들에 더해 성(性)·인종 차별 등 문제로 미국 사회 안팎의 비난에 휩싸이면서 방송 중계도, 관객도 없이 열리게 된 것이다.
4일 AP 등 외신에 따르면, 골근글로브 시상식을 주관하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ollywood Foreign Press Association·FFPA)는 오는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비벌리힐스 호텔에서 79회 행사를 연다고 발표했다. 다만 관객이 참석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방송 중계도 하지 않는다.
HFPA는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인 오미크론 문제로 관객을 들여보내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지만, 미국 현지 언론은 코로나 사태보다는 최근 HFPA를 향한 할리우드의 불신 탓에 행사를 정상적으로 진행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골든글로브 측은 NBC 등 현지 언론이 골든글로브 중계를 거부하면서 지난해 12월 후보 지명 행사를 유튜브로만 생중계했다. LA타임즈는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예년과 같은 것은 수상자를 선정하고 트로피를 주는 것 뿐”이라며 “이제는 레드카펫도 없고, 관객과 취재진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시상식에는 워너미디어·넷플릭스·아마존스튜디오 등 미국 내 대형 제작사 등이 대거 불참을 선언한 상태다. 따라서 올해 시상식에서 TV 드라마 부문 작품상·남우주연상·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측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한국 배우 최초로 골든글로브 시상식 남주우연상 후보인 이정재와 오영수 역시 시상식에 가지 않기로 했다. 이정재 측은 “후보에 오른 건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현지 분위기를 고려해 참석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대한 여론이 이처럼 악화된 건 지난해 2월 LA타임즈의 보도로 HFPA의 부패 의혹이 불거지면서 부터였다. HFPA가 2019~2020년 회원들에게 출처를 알 수 없는 돈 약 200만 달러를 지급한 것은 물론이고 2019년엔 제작자 파라마운트 협찬으로 회원 30여명이 프랑스 파리로 초호화 여행을 떠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HFPA 회원은 87명으로 매우 적어 로비 문제가 끊임없이 불거져 왔다.
이와 함께 인종 차별 성 차별 논란도 터져나왔다. HFPA 회원 중 흑인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할리우드 최고 스타 중 한 명인 스칼릿 조핸슨이 HFPA 회원에게 성 차별적 질문을 받고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고 폭로하면서 영화계 안팎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또 지난해 행사에선 미국 영화사가 제작한 미국 영화인 ‘미나리’를 영어 대사가 적다는 이유로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려 크게 비판받기도 했다.
이처럼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지 않자 매년 골든글로브를 중계해온 NBC가 중계 거부를 선언했고, 대형 제작사들이 줄줄이 골든글로브 보이콧을 선언했다. 또 할리우드 스타들이 소속된 홍보사 100여개 역시 골든글로브가 환골탈태 할 때까지 참여하지 않겠다는 공동 성명을 내기도 했다. 전 세계적인 슈퍼 스타인 톰 크루즈는 그간 골근글로브에서 받은 트로피 3개를 모두 반납하기도 했다.
HFPA는 지난해 시상식 이후 쇄신 작업을 진행해 이사회를 정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흑인 기자 6명을 포함해 21명의 새로운 회원들을 영입하고 행동 강령을 업데이트했다고 주장해왔다. 헬렌 호니 회장은 당시 “올해는 HFPA에 있어서 변화와 반성의 한 해였다”고 했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골든글로브를 향한 강경 대응 기조를 바꾸지 않고 있다.
한편 골든글로브는 영화와 TV드라마를 다루는 미국 최고 시상식 중 하나로 꼽힌다. 영화 부문에선 오스카 향방을 알 수 있는 시상식으로 평가받고, TV드라마 부문에선 에미상 시상식과 함께 양대 행사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