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러시아 석유 금수 제재안에 합의한 가운데, 러시아산 원유가 인도 등을 통해 세탁된 뒤 전 세계에 수출되고 있다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WSJ은 1일 헬싱키 소재 싱크탱크 ‘에너지 및 청정공기 연구센터’ 분석 자료, 금융정보업체 레피니티브, 해운 기록 등을 인용해 인도 정유회사들이 러시아산 석유를 대량으로 사들여 수에즈 운하를 통해 대서양 일대에 수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업체들은 미국과 EU의 석유 제재에 따라 원산지를 가리기 위해 러시아산 석유를 휘발유, 디젤, 화학 제품 등 정제유로 위장해 유통시키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러시아 석유 수출은 지난 3월 감소한 뒤, 4월 반등했다. 러시아 석유 수출량은 하루 62만배럴 증가해, 하루 810만배럴로 전쟁 전 수준에 근접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인도의 러시아 석유 하루 수입량은 80만배럴로 급증했으며, 인도가 러시아 석유 유통 핵심 허브로 떠올랐다고 WSJ은 설명했다.
인도 에너지 대기업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는 지난달 러시아산 원유를 전쟁 전 대비 7배 이상 구매했다. 릴라이언스 전세 유조선은 지난 4월21일 휘발유 성분인 알킬레이트를 싣고 예정된 목적지 없이 인도 시카항에서 출항했으며, 지난달 22일 화물을 뉴욕에 하역했다.
라우리 밀리비르타 에너지 및 청정공기 연구센터 수석 분석가는 “릴라이언스는 할인된 러시아산 원유를 정제한 뒤 미국 바이어를 찾을 수 있는 단기 시장에서 상품을 판매했다”며 “러시아 원유를 인도에서 정제한 뒤 일부를 미국에 파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인도의 정제유 수출은 러시아 원유가 하락 영향으로 전쟁 초기부터 급격히 증가했다. 분기 기준 유럽 일일 출하량은 3분의 1, 미국 출하량은 43% 늘었다.
이란과 베네수엘라 제재 원유 거래 방식인 해상 환적도 지중해, 서아프리카 앞바다, 흑해 등에서 이뤄지고 있다.
WSJ에 따르면 지난주 러시아 원유를 실은 ‘젠 1호’는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약 200만 배럴 수용 가능한 초대형 유조선 ‘로렌 2호’와 접촉했다. 선박 자료에 따르면 젠 1호는 화물을 옮긴 것으로 보이며, 로렌 2호는 지브롤터를 거쳐 중국으로 갈 것으로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유럽이나 아시아 정유사들이 이란, 베네수엘라, 러시아 석유를 구입하는 행위는 불법이 아니지만, 제재 대상에 오른 은행과 해운 회사 등과 거래에 정치적 위험이 뒤따르는 만큼 중단되는 추세라고 WSJ은 설명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 원유를 구입한 정제사들이 구매자들에게 원산지를 숨기는 행위가 늘고 있다고 WSJ는 지적했다. 이스라엘 선박 자료 회사 윈드워드에 따르면 러시아산 원유 수송 선박이 GPS 장비를 끄는 사례는 급증하고 있다.
중국 바이어들은 러시아산 석유 운송에 드는 고비용을 피하기 위해 원산지를 숨기는 방법을 찾고 있다.
중국 거대 석유회사 시노펙 자회사 유니펙 등은 원산지가 표기된 러시아 석유를 근거리 해상에서 선박으로 옮긴 뒤 운송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EU는 지난달 30일 특별 정상회의를 통해 올해 말까지 러시아산 석유 수입 90%를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유럽 보험사를 대상으로 러시아산 석유 운송 선박에 대한 보험도 금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침공 다음달인 지난 3월부터 러시아산 원유, 석유 제품, LNG, 석탄 등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다만 연료가 디젤 등 혼합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아 제재 회피 여지가 남아 있다.
국제통상 변호사들에 따르면 미국 재무부 산하 해외자산관리국(OFAC)은 원산지 기준을 통상 25% 이상으로 삼고 있다. 외국산 제품으로 변형된 상품은 제외되며, OFAC이 휘발유나 디젤로 정제된 원유를 예외에 포함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았다고 전문가들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