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유럽국가들을 상대로 천연가스 전쟁을 시작했다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0일 보도했다.
유럽국들은 10일 동안 파이프라인 정비를 이유로 중단된 천연가스가 21일 재개되기를 학수고대한다. 이와 관련 푸틴 대통령은 19일 러시아가 계약상 공급의무를 다할 것이나 제재로 인해 파이프라인 가동이 힘들면 공급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러시아는 몇 개월째 능력보다 크게 적은 양의 천연가스를 유럽에 공급해왔다. 또 유럽 각국 지도자들은 푸틴의 발언이 러시아 국영 에너지 회사 가즈프롬 PJSC를 악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우르술라 폰 데어 라이옌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가즈프롬이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공급자임을 보여줬다. 가즈프롬 뒤에는 모두가 알듯이 푸틴이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뻔하다”고 말했다.
분석가들과 업계 관계자들은 푸틴이 가스공급을 완전 중단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유럽을 경기 침체에 빠트리고 수백만명이 난방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조치는 딱 한번만 쓸 수 있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푸틴이 계속 찔끔찔끔 공급하는 전략으로 가격을 높여 전쟁비용을 마련하고 러시아의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으로 본다.
미국의 EU 주재 대사를 역임하고 대서양위원회 글로벌 에너지센터를 설립한 리처드 모닝스타는 “푸틴이 유럽에 (가스공급을) 끊었다가 조금 열어주는 식으로 장난을 칠 수 있다. 소련 국가보안국(KGB) 출신인 그는 전술가다. 심리전을 펴면서 유럽을 굴복시키고 돈도 벌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푸틴의 목표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강력히 맞서는 서방 동맹을 해체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한다. 위협하고 공급을 쥐락펴락함으로써 유럽인들의 우크라이나 지지를 약화시키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들이 반목하도록 하려는 속셈이라는 것이다.
천연가스는 러시아에 큰 무기다. 러시아의 주 소득원은 석유여서 천연가스 판매는 하지 않아도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 이에 비해 EU는 지난해 천연가스 수입량의 40%를 러시아에서 수입했다.
그러나 천연가스를 전략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푸틴에게도 위험부담이 크며 그가 부릴 술수도 제한된다. 천연가스 공급을 완전 차단할 경우 러시아는 50년 동안 구축해온 신뢰할 만한 공급자로서 평판을 잃게 된다. 또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이미 긴장한 유럽국들이 대체 에너지원을 찾으면서 힘을 잃을 수 있다. 러시아는 결국 중국 수출에 크게 의존할 수 없게 돼 중국이 러시아와 관계에서 우위에 서도록 만든다.
조지 워싱턴대 테인 구스타프손 교수는 “푸틴은 분명 지정학적 이유로 50년 동안의 성취를 폐기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독일 등 유럽 경제 대국들은 이미 러시아 에너지 의존을 줄이는 노력을 시작했다. 올들어 러시아 천연가스 수입 의존이 절반 수준인 20%로 줄었다. EU는 앞으로 5년 내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을 완전히 떨쳐버릴 계획이다.
미국은 유럽국들에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에너지 의존이 러시아의 정치경제적 협상력을 높일 것이라고 경고해왔다. 반면 유럽은 러시아와 교역을 늘려 유럽에 편입시키는 쪽에 걸었다. 독일은 지난 2011년 노르트 스트림 해저 파이프라인을 설치해 수십억 입방m의 천연가스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2020년에는 국내 에너지 수요의 10%를 러시아에 의존했다.
러시아가 지난달 제재로 인해 터빈 수리가 지연된다면 천연가스 공급을 절반으로 줄인 것에 대해 유럽의 당국자들과 에너지 회사 임원들은 말도 안된다고 비난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달 “러시아가 에너지를 전쟁 무기로 쓰고 있다”고 말했다.
계획에 따른 정비를 내세워 노르트 스트림 파이프라인을 통한 공급이 완전 차단될 조짐도 있다. 러시아 천연가스 최대 수입회사인 독일 전기회사 유니퍼 SE는 18일 불가항력에 따라 가스공급을 중단한다는 가즈프롬의 서한을 받았다고 밝혔다. 불가항력은 가스 공급을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 면제 조항이다. 러시아는 또 다른 파이프라인을 통한 공급도 줄이고 있다.
푸틴이 무슨 일을 벌이든 무관하게 유럽은 겨울철 에너지난 위기에 봉착해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E)는 최근 유럽이 올 여름과 가을 수요를 줄여 비축량을 늘려야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상 고온으로 에너지 사용이 늘어나면서 이마저도 쉽지 않다.
천연가스 공급 감소로 인해 유럽 경제는 이미 피해를 보고 있다. 물가가 역대 최대 수준으로 치솟으면서 유럽 금융시장이 떨고 있다.
겨울 날씨가 좋든 나쁘든 러시아 천연가스에 중독된 유럽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소멸할 것이다. EU는 2027년까지 러시아 석유의존에서 탈피하기 위한 2100억유로(약 281조1438억원) 규모의 예산 집행을 시작했다.
독일 본대학 프랑크 움바흐 연구원은 푸틴이 에너지 벼랑끝 전술로 서방의 러시아 제재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의지가 약해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분열조짐도 없지 않다. 헝가리 정부는 천연가스 등의 에너지 수출을 중단했다. 우크라이나는 노르트 스트림 파이프라인에 쓰이는 가스 터빈을 수리한 캐나다가 가즈프롬에 공급하겠다고 발표하자 목청을 높였다.
유럽은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유럽의 액화석유가스(LNG) 수입량은 전세계 수출량의 3분의 1로 늘어났으며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새로운 공급자와 장기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수십년 동안 액화석유가스(LNG) 시설 투자를 등한시한 탓에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에서 연결되는 남부 가스 회랑을 통한 수입량이 갈수록 줄어온 점이 약점이다.
비록 줄어든 양일지라도 가스프롬이 높은 가격에 천연가스를 유럽에 판매하면 수입을 올릴 수 있다. 옥스포드에너지연구소 선임연구원 비탈리 예르마코프는 가스프롬이 전세계 천연가스 수출로 올리는 수입이 올들어 최소 2배로 증가한 1000억달러(약 131조37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러시아는 장기적으로 최대 시장을 잃음으로써 이익이 줄어 보조금에 기대 러시아 주민들에 저가에 공급하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다. 석유와 달리 천연가스는 선박에 실어 수출하기가 어렵다. 유럽 수출이 줄어들면 러시아는 국내 비축량을 늘리거나 태워버리거나 아니면 생산을 줄일 수밖에 없다.
컨설팅 회사 우드 매켄지의 연구 책임자 마이클 모이니헌은 “파이프라인은 대부분 서쪽을 향하고 있다. 그곳 말고는 팔 곳이 없다. 중국에는 시설이 없어 팔지 못한다. 수요가 없는 국내 판매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S&P 글로벌사 부사장인 에너지 역사학자 대니얼 예르긴은 유럽시장을 대신해 중국에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데 4,5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앞으로 2, 3년 동안은 러시아가 최대 석유 및 가스 공급자가 될 수 있지만 에너지 초강대국이 될 순 없다. 중국 의존이 갈수록 커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