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 100달러’. 지난 9월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주요 투자은행들이 줄줄이 국제 유가 전망치를 올렸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세계은행(WB)은 최고 157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넘게 이어진 데다 석유수출국기구(OPEC)플러스의 감산 연장, 게다가 10월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의 분쟁까지 터졌으니 그럴 만도 하죠.
에너지 해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로선 국제 유가 인상은 곧 휘발유·경유 가격 인상으로 이어집니다. 고금리·고물가로 살림살이도 퍽퍽하다 보니, 이 같은 전망에 걱정이 앞섭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유가는 연말까지 줄줄이 하락합니다.
31일 한국석유공사가 운영하는 오피넷에 따르면 이달 넷째주 기준 국내 주유소 휘발유 판매가격은 전주 대비 5.9원 하락한 ℓ(리터) 당 1500.1원을 기록했습니다.
국내 유가는 10월 둘째주부터 12주 연속 내림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은행의 전망치가 나오기 2주 전부터 3개월 동안 치솟기는커녕 오히려 꾸준히 떨어진 셈이죠. 국제 유가가 하락했기 때문인데요. 국내 기름값은 국제 유가와 2~3주의 시차를 두고 움직이거든요. 두바이유 기준 10월초 배럴 당 90달러를 넘어서던 국제 유가는 지난달 한 때 70달러 대를 찍더니, 지난 13일에는 71.63달러까지 내려앉았습니다.
기름을 수입하는 우리로서는 다행이긴 한데, 국제 전망과 실제 유가는 왜 달리 움직인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앞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지난해 2월 이후, 국제 유가는 실제로 10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두바이유 기준 지난해 1월초 76달러였던 유가는 2월초 90달러를 넘어서더니 3월2일 110달러도 돌파합니다. 급기야 이달 8일 127.99달러까지 치솟죠. 전쟁 당사국인 러시아가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산유국 중 하나다 보니, 공급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후 90달러 대까지 내려오긴 했지만 지난해 하반기까지 고유가 여파는 계속됐죠.
그렇다보니 지난 10월 중동에서 이-팔 사태가 터진 이후에도 유가에서 같은 패턴이 반복될 것이라고 예측한 겁니다. 다만 러-우크라 때와 달랐던 이유라면, 이들 국가가 중동에 위치하긴 했지만 산유국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계은행도 전쟁이 중동 산유국까지 확전되면서 원유 공급에 차질이 빚어질 때를 가정하고 전망한 바 있습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세계 원유 수급 현황 및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영향’ 리포트에서 세계은행 전망치를 소개했는데요. 이번 사태가 과거 리비아 내전 때와 유사한 상황으로 확전될 때, 원유 공급이 많게는 2% 감소하면서 90달러에서 최대 13%까지 추가 상승할 수 있을 것으로 봤고요. 2003년에 발발한 이라크 전쟁처럼 원유 공급이 더 차질을 빚는다면 90달러 대에서 35%추가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죠. 최악의 사태로 1973년 아랍 국가가 석유 수출 금지를 단행했을 때처럼 확전된다면 세계 원유 공급이 8% 줄어들면서 150달러대까지 오를 것으로 우려한 겁니다.
하지만 이-팔 사태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인근 국가로 확전되지는 않고 있어 국제 유가는 우려처럼 오르진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떨어진 배경으로는 수요에 있는데요. 공급량은 크게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경기 침체 우려에 수요가 위축됐다는 설명입니다.
김태환 에경원 석유정책연구실장은 “글로벌 경기 둔화 우려가 시장에 더 짙게 드러난 것이 유가에 반영된 것 같다. 중국과 미국이 어려울 것이란 이슈가 나온 것이 원유 수요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면서도 “70달러를 하한선으로 두고 당분간 안정세를 보일 것 같다”고 전망했습니다. 그렇다면 내년에는 어떻게 될까요. 아무래도 글로벌 둔화 우려가 이어진다면 수요가 줄면서 지금같은 안정세는 계속되겠지만, 결국 관건은 두 전쟁의 향방이겠죠. 경제적 우려는 물론 사상자가 속출하는 전쟁이 하루 속히 끝나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