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운동선수 출신 부모를 둔 현역 선수들은 누군가의 아들, 딸이라는 수식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같은 종목이건, 다른 운동을 하건 상관없이 2세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과거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고독한 황태자’로 명성을 떨쳤던 윤학길의 딸인 윤지수(서울특별시청)도 예외는 아니었다. 윤학길은 KBO리그 역대 최다 완투(100경기), 완투승(75승)을 거둔 전설의 투수다. 이는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운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파리에서 한국 펜싱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여자 단체 사브르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윤지수는 더 이상 ‘윤학길의 딸’이 아닌, 한국 펜싱의 새 역사를 쓴 선수로 이름을 떨치게 됐다.
윤지수는 여자 사브르 대표팀 멤버인 최세빈(전남도청), 전하영(서울특별시청), 전은혜(인천광역시 중구청)와 함께 3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대회 단체전 결승에서 우크라이나에 패배했다.
금메달을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역사상 첫 여자 사브르 단체전 은메달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세대교체에도 제 기량을 뽐낸 최세빈, 전하영, 전은혜뿐 아니라, 주장으로서 중심을 잡아준 윤지수의 공도 컸다.
1993년생으로 올해 31살인 윤지수는 중학생 시절, 체육 선생님의 권유로 펜싱부 일원이 됐다고 한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스포츠인의 길을 걸은 그는 2세 스포츠인답게 남다른 운동신경으로 가파른 성장세를 그렸다.
그리고 약관의 나이가 채 되기도 전에 태극마크를 달며 촉망받는 펜싱 유망주로 자리매김했다.
유망주에서 한국 펜싱의 간판이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여자 사브르 단체전 우승에 힘을 보탰다.
또 2021년 열린 2020 도쿄올림픽에선 한국 여자 사브르 사상 첫 단체전 동메달을 합작하기도 했으며, 지난해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아시안게임 개인전 첫 금메달을 땄다.
이번 대회 개인전에서는 16강서 조기 탈락하는 아쉬움을 남겼으나, 단체전에서 동료들과 함께 한국 펜싱의 새 역사를 썼다.
프랑스 파리에서 달성한 한국 신기록이라 의미는 배가 됐다.
이번 대회 개최국인 프랑스는 펜싱 종주국이다. 세계랭킹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실력도 강하다.
그런 프랑스를 4강에서 물리치는 저력을 발휘했다.
윤지수는 비록 패배한 결승전에 나서지 않았다. 전략적 차원에서 프랑스전을 소화한 뒤, 다음 올림픽에 나설 후배들이 결승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하는 주장의 선택과 집중이었다.
우승까지 못했지만 값진 경험과 은메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윤지수 개인은 올림픽 2개 대회 연속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윤지수는 경기 후 취재진을 만나 “한국 여자 사브르를 최초로 은메달을 목에 걸 수 있어서 너무 좋다”며 “후배들이랑 함께 은메달을 목에 딸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애들이 잘해줘서 너무 멋있었다. 선배로서 후배들이 잘하는 모습을 보니까 기특하기도 하고, 또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맘ㄴ으로도 나는 영광스럽게 생각했다”며 “(도쿄 동메달에서) 색을 바꿨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기분이 좋다”고 덧붙였다.
윤지수는 이번 대회를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시사했다.
그는 “이번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음에는 이 친구들이 금메달을 딸 수 있게 선배로서 도와주고 싶다”며 “(결승에 못 나간게) 전혀 아쉽지 않았다. 후배들이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이 친구들은 앞으로 다음을 가야 하니, 내가 욕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아버지에게 한 마디 해달라는 질문에는 “아빠! 나 벌써 메달 2개 땄어”라고 외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