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선거 유세 발언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전 세계 독재자들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미 워싱턴포스트(WP)가 2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WP는 일부에선 트럼프가 푸틴에게 약점이 잡혀서 비판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그보다는 강력한 지도자를 부러워하는 트럼프의 심리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는 이달 들어서만 친 러시아적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 방위비를 늘리지 않으면 러시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둘 것”이라고 말했다. 알렉세이 나발니 반체제 인사의 사망을 두고 푸틴을 비난하기는커녕 자신이 나발니를 닮은 정치범이라고 주장했다. 지난주에는 러시아가 “히틀러를 무찔렀다”며 칭찬했다.
트럼프는 줄곧 러시아를 칭찬하고 푸틴을 높이 평가하며 2016년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과 2년전 우크라이나 침공 등 주요 사안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길 거부했다.
Trump reveals what he's looking for in a VP pick. pic.twitter.com/La842lVrmT
— Laura Ingraham (@IngrahamAngle) February 22, 2024
그러자 일각에서는 트럼프가 푸틴에게 약점이 잡혔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이 2019년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왜 매사에 푸틴이냐”고 따진 일이 대표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째 접어드는데도 트럼프의 친러 행보는 전혀 변함이 없다. 오히려 그가 주도하는 공화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가로막고 있다.
펠로시 전 의장은 최근 “이유가 무엇이든 트럼프의 푸틴 사랑은 나토에 위험하고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수호에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또 “나발니에 대한 발언도 트럼프가 러시아에 무슨 약점이 잡혔냐는 생각이 들게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러시아 전문가와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약점이 잡힌 것이 아니며 푸틴과 같은 강력한 독재자를 좋아할 뿐이라고 말한다.
볼튼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 되고 싶어해”
트럼프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보좌관 출신으로 트럼프를 강력히 비판해온 존 볼튼은 “트럼프는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강력한 사람을 좋아하고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트럼프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시진핑 중국 주석 등 독재자를 두루 좋아한다고 강조했다.
볼튼은 트럼프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 특히 여성 지도자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면서 시주석이 “중국을 장악하고 있는 것에 매료돼” 그를 “왕”으로 부르기까지 했다고 설명했다.
마이클 맥폴 전 주러대사도 트럼프가 독재자들을 좋아한다면서 트럼프도 독재자들과 같은 통치 철학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독재자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닮은 점이 있고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즘 민족주의자들이 득세하는 흐름이 있으며 트럼프의 발언과 푸틴의 발언이 매우 유사하다”면서 “트럼프가 푸틴을 따라하는 것이라기보다 세계관이 비슷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허영심, 터프가이 선호 때문에 독재자들에 빠져”
익명의 트럼프 보좌관 출신 인사는 트럼프가 “독재자를 부러워한다”고 했다. “매일 10여 차례” 자신과 고위 보좌관들이 트럼프에게 푸틴이 위험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협한다고 설명하려 애썼지만 트럼프는 푸틴의 “터프 가이” 이미지에 매료돼 있었다고 했다.
그는 “푸틴 등이 트럼프에게 먹혔을 뿐”이라면서 “허영심, 터프 가이 선호 때문에 그들에게 빠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트럼프 선거 본부는 트럼프가 푸틴에게 무르다는 지적을 배격한다. 캐롤린 리빗 트럼프 선거 본부 대변인은 성명에서 푸틴이 트럼프보다 바이든이 상대하기 좋은 미 대통령이라고 말한 것을 지적하면서 “푸틴은 몇 년 씩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바이든을 우습게 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일 대 러시아를 포함한 모든 적들이 가만 있었던 것은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트럼프와 푸틴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미 정보당국, 상원 특위, 로버트 뮐러 특별 검사의 수사로 러시아가 2016년 미 대선에 개입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푸틴과 회담 내용 측근들에도 설명 안 해
다만 트럼프는 러시아의 선거 개입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을 “마녀사냥”하는 “러시아 사기극”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은 트럼프가 러시아 선거 개입설을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여긴 탓에 러시아 정책과 스스로를 분리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유럽 및 러시아 담당 선임 국장을 지낸 피오나 힐은 “트럼프에겐 러시아가 자신을 위해 선거에 개입했다는 건 자신의 선거 승리를 깍아 내리는 일이었다. 항상 ‘아니다, 아니다, 내가 크게 승리했다’고 말하곤 했다. 푸틴 때문에 굴욕당하는 걸 싫어했다”고 말했다. “푸틴이 트럼프에게 ‘우리가 당신을 당선시켰어’라고 말하기라도 했으면 폭발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동기가 무엇이든 트럼프의 대러 정책 노선을 지지하는 세력도 적지 않다. 케이토 연구소 외교안보정책 책임자 저스틴 로건은 바이든 정부의 우크라이나 정책이 “끝없이 전쟁하자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공화당 유권자들은 ‘전쟁에 승리할 방도가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 러시아의 고혈을 짜내기 위해 무한정 돈을 쓰자는 건데 미국 납세자들에겐 좋은 일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방위우선재단의 에드워드 킹 이사장은 트럼프가 나토와 관련해 “유럽국들의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나토 내 미국의 역할을 재고해야 한다. 영원한 동맹은 없다. 미국의 안보 이익 때문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온갖 분쟁에 얽혀드는 일일 뿐”이라고 했다.
부동산 개발업자 시절 모스크바 대대적 진출 시도 전력
반면 뉴욕의 부동산개발업자 시절 러시아에 대대적으로 진출하려 시도했던 트럼프의 전력 때문에 각국 지도자들과 민주당 정치인들, 트럼프의 안보보좌관들, 일부 공화당원들까지 우려하는 것도 사실이다.
2016년 6월 트럼프의 장남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가 뉴욕의 트럼프 타워에서 트럼프의 경쟁자 힐러리 클린턴의 약점을 주겠다는 러시아인들을 만났다.
트럼프는 심지어 기자회견에서 공개적으로 러시아에게 클린턴의 이메일을 해킹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내말 믿고 사라진 3만 건의 이메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트럼프는 대통령 당선 뒤에도 푸틴과 브로맨스를 뽐냈다. 2017년 5월 트럼프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러시아 외교장관 및 주미 러시아 대사에게 비밀을 알렸다. 당시 전현직 미 당국자들이 이슬람국가(IS)에 대한 미국의 정보 소스를 노출시키는 일이라고 경고했었다.
트럼프는 또 나토를 뒤집어놓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푸틴의 오랜 소원인데 말이다. 2018년 헬싱키 정상회담 때 통역만 대동한 채 푸틴과 2시간 동안 비공개회담을 한 트럼프는 푸틴과 함께 한 기자회견에서 미국 정보기관의 러시아 선거 개입 판단을 배격하고 푸틴 편을 들었다.
이후 재임 기간 내내 푸틴을 만났을 때마다 대화 내용을 고위 보좌관들에게조차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려 애썼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도 여전했다. 2022년 2월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트럼프는 푸틴이 “천재”라면서 “우주 잘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 NSC 유럽 및 러시아 국장을 지낸 알렉산더 빈드먼은 나토 회원국들을 향해 푸틴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겠다고 위협한 트럼프 발언 때문에 푸틴이 우크라이나 공세를 강화할 것으로 우려했다.
“2기 트럼프 정부가 우리 적에게는 친절하고 동맹에는 적대적이 될 것임을 알리는 일이다. 러시아로선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