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 옛 소련 시대 잔혹했던 것으로 유명했던 강제수용소의 역사를 감추려는 러시아 정부가 메모리얼 인터내셔널이라는 인권단체를 폐쇄하려 한다고 미 뉴욕타임스(NYT)가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옛 소련이 무너지던 시기 러시아는 혼란과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도 표현의 자유, 역사 검증 및 정치적 반대를 허용하는 개방을 향한 해방의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권력을 장악한 지난 20년 동안 정부가 그런 권리들을 약화시켰다. 푸틴 대통령이 소수 집권세력을 길들이고 미디어를 탄압하며 종교단체와 반체제인사들을 투옥하고 정치적 반대를 억눌러 온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고통스러웠던 초기 옛 소련의 역사를 고쳐쓰려 하고 있다. 수백만명의 러시아인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해 숨지게 했던 20세기 전반기 역사를 말이다. 러시아 잔혹했던 옛 소련 체제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는 일을 해온 메모리얼 인터내셔널이라는 인권단체와 이 단체가 보유한 기록물을 러시아 검찰이 압수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모스크바 카네기재단 웹사이트의 알렉산드르 바우노프 편집책임자는 푸틴대통령이 “대러시아의 부활”에 사로잡혀 있다면서 “푸틴의 러시아 자체가 1990년대의 개혁과 자기 비판 및 사회적, 경제적 혼란을 부정하면서 만들어졌다. 푸틴에게 그 시대는 러시아가 가장 약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메모리얼 인터내셔널을 제거함으로써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웠던 시기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고 바우노프는 강조했다.
그는 푸틴대통령의 독재적 통치방식을 가리키는 “수직 권력(power vertical)”이라는 표현을 상기시키면서 “국가가 ‘수직 기억(Memory Vertical)’을 만들려 한다. 피해자들이 피해자라는 것을 부정하진 않지만 압제에 대한 기억을 바꾸고 싶어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주 두 차례 열리는 법원 심의에서 메모리얼 인터내셔널의 운명이 판가름날 수 있다. 22일 모스크바 법원이 메모리얼의 인권센터가 정치범 명단에 투옥된 종교단체원들을 포함시켰다는 이유로 “테러활동을 지지했다”는 고발을 심의한다. 며칠 뒤에는 대법원이 메모리얼 인터내셔널이 보관하고 있는 종교단체 기록물이 “외국 스파이”법을 위반했다는 고발을 심의한다.
이 같은 움직임은 류드밀라 유르메니치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악명높은 북극지방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됐던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과거 일을 말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커다란 공포 때문에 회상하는 일 자체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라면서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어머니로부터 수용소 시절에 대해 들었다고 했다.
유르메니치는 메모리얼 인터내셔널이 1929년부터 요시프 스탈린이 숨진 1953년 사이에 강제노동수용소에 있었던 2000만명에 대한 기록을 보존해온 활동 덕분에 위안을 받고 있다. 몹씨 추운 날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수용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아와 질병으로 숨졌다.
유르메니치는 며칠 전 저녁에 인형이나 나막신, 배급된 빵을 자를때 사용하던 노끈 조각과 같은 여성 수용자들의 소지품을 전시하는 메모리얼 박물관을 방문했었다. 그는 “우리 나라가 이 시기를 기억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 공포를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 나라가 자유롭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메모리얼 박물관 책임자 이리나 갈코바는 유르메니치의 아버지가 살던 시대와 현재의 러시아 사이에 비슷한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현재와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기억들을 볼 수 있다”면서 “똑같지는 않지만 지금도 예전과 비슷한 논리와 악이 배경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갈코바는 메모리얼이 보존하는 기록들이 현대 러시아의 인권 상황과 분리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탄압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메모리얼의 인권센터는 시민 자유를 감시하고 반체제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해왔다. 이 단체는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인권법원에 제기된 1500건의 소송을 지원해왔다.
메모리얼은 3개월전에 러시아의 정치범이 419명에 달한다고 발표한 것이 빌미가 돼 폐쇄될 수 있다고 지난 주 밝혔다. 메모리얼은 정치범수가 구소련말기의 거의 2배에 달하며 46명이던 2015년보다 크게 늘어났다고 발표했었다.
정치범 명단에는 야당 정치인 정부의 독살기도로 죽을 뻔했던 알렉세이 나발니도 포함돼 있지만 대부분은 러시아에서 활동이 금지돼 테러단체 취급을 받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종교단체 일원이라는 이유로 수감돼 있는 사람들이다. 러시아 검찰이 메모리얼 인권센터를 “테러활동”을 용인한 혐의로 기소한 이유다.
주 후반에 열리는 대법원 재판은 러시아의 “외국 스파이”법 위반을 심의한다. 이는 언론인과 시민사회활동가 및 야당지지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사법당국은 스탈린 시대 “인민의 적”이라는 표현을 연상시키는 “외국 스파이” 딱지를 공공연하게 붙이면서도 이들의 스파이활동이 실패했다고 밝히고 있다. 사법당국은 또 매우 까다로운 회계절차를 지키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외국 스파이라는 고발에 법적으로 맞설 수단도 보장하지 않고 있다.
메모리얼은 유럽인권재판소에 외국스파이 고발 건을 제소하면서도 러시아 법원이 내린 600만루블(약 974만원)의 벌금 판결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갈코바가 밝혔다.
지난 14개월동안 회계기관이 메모리얼 인터내셔널이 법을 위반한 사실을 찾아내지 못했으나 푸틴 정부의 인권위원회는 메모리얼 인권센터가 두차례 사소한 위반을 했다고 밝혔다. 이 단체조차 이 건으로 “가장 오래된 공공단체를 강제해산하는 것은” 위반 정도에 맞지 않는 “비정상적 조치”라고 밝혔었다.
검찰이 메모리얼 폐쇄에 성공한다면 러시아 법무부가 외국 스파이로 딱지를 붙이 10여개의 다른 단체와 개인들도 힘들어질 전망이다.
메모리얼은 이번 일 이전에도 몇 년 동안 탄압을 받아 왔다. 메모리얼과 함께 스탈린 시대 희생된 9000명의 기록을 찾아낸 역사가 유리 드미트리에프가 지난해 소아성애 혐의로 기소돼 투옥된 사건에 대해 인권단체들은 혐의가 조작됐다고 주장해 왔다.
지난 달 중순 10여명의 남자들이 1930년대 우크라이나의 기사상황을 담은 영상을 보고 있던 메모리얼 사무실에 난입해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모든 사람을 안에 가둔 채 문을 잠그고 단체 관계자들과 방문객들을 6시간 동안이나 조사했다.
메모리얼의 지지자들은 검찰의 기소가 기각될 것으로 예상한다. 2015년 대법원이 러시아 법무부가 메모리얼을 폐쇄하려는 소송을 기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와 현재는 정치적 상황이 크게 다르다. 푸틴 대통령 정부는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메모리얼 박물관 책임자 갈코바는 전국에 있는 메모리얼 지부들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돼 있고 각자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메모리얼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메모리얼 예레나 쳄코바 집행이사는 “최후의 수단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면서 “다시 돈을 모으고 시설을 마련하고 적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강제수용소 유품들을 다시 수집해 전시하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