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에사오의 장자권을 가로채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형은 에사오이고 동생은 야곱이었다. 남성적이고 사냥을 좋아하는 마초 맨 형 에사오에 비해 동생 야곱은 여성적이고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해 엄마의 치마폭에 매달려서 사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마마보이였다고나 할까?
그런 야곱이 엄마와 공모하여 형을 밀어내고 아버지 이사악으로부터 모든 권리와 축복을 빼앗는 음모를 꾸민다. 어느 날 야곱은 형이 야외에 사냥 나간 틈을 타 노쇠하여 눈이 멀어 앞을 잘 못보는 아버지 앞에 준비한 예물을 갖고 나가면서 미리 준비한 계획대로 양털 가죽을 팔에 휘감아 몸에 털이 가득한 형처럼 꾸미고 목소리는 감기가 들어 변한 것처럼 속여 아버지에게서 장자권의 모든 축복을 가로챈다.
그리고는 사냥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한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라반의 작은 딸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외삼촌에게 속아 21년이란 긴 세월동안을 일해주고 나서야 언니 레아와 함께 동생 라헬 모두를 아내로 얻은 후 그 동안 불린 많은 재산을 갖고 형에게로 돌아와 용서를 받는다.
남을 속였던 야곱이 오히려 남으로부터 속임을 당하고 오랜 세월을 고난과 아픔 속에 살면서 집념이 강했던 야곱에서 순종하는 야곱으로, 다시 순명하는 야곱으로 차츰 성화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신앙 이야기이다.
헌데 야곱이 도망자 신세로 외삼촌 집으로 가던 중 인적이 끊긴 들판에서 노숙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잠을 자던 중 꿈에 하느님을 만나 ‘네가 모든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는 말씀의 축복을 받는다. 잠에서 깬 야곱은 자신이 베고 자던 돌베개를 기둥으로 세우며 하느님이 계시는 ‘하느님의 집’ 즉, ‘벧엘’이라 불렀다.
그리고 후에 이 돌은 9세기에 독립한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옮겨져 국왕 대관식 옥좌로 쓰이게 되면서 ‘운명의 돌’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13세기에 들어 스코틀랜드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이를 전리품으로 취해 잉글랜드 국왕 대관식이 열리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성당의 옥좌 밑에 바닥석으로 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 돌의 소유권을 놓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수세기 동안 싸우다가 1996년 존 메이저 당시 영국 총리가 반환했다. 단, 대관식 때는 잉글랜드로 가져와서 쓴다는 조건이었다.
지난 6일 영국 찰스 3세 국왕 대관식이 열렸다. 이번에도 이 돌은 런던으로 옮겨져와 의자밑에 깔았다. ‘신성의 권위’를 상징하는 돌이기 때문이다. 헌데 무려 70년만에 이루어진 대관식에서 시대가 변해서인지 군주제 회의론이 갈수록 커지는 마당에 찰스3세 국왕의 ‘신성의 권위’에 대한 왕족과 성직자가 무릎꿇고 충성맹세하는 의식을 일반인에게도 요구한 것에 비판이 일고 특히 젊은층이 외면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왕실가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최고권력을 갖고 시민들 위에 군림하는 특별한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다. 말하자면 영국판 ‘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하는 말인 셈이다.
‘인간의 권리는 신성불가침의 권리다’를 기치로 권리장전을 채택해 인권선언을 맨 먼저 한 나라. 앞서서 노예해방을 선언해 프랑스나 미국에 영향을 준 나라. 왕은 ‘군림(君臨)하되, 통치(統治)하지 않는다’고 했던 나라. 그랬던 영국이 후퇴하는 길로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신성의 권위보다 벧엘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