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브스지가 발표한 ‘세계 최고의 직장’으로 4년 연속 선정된 삼성전자의 대표적인 해외 연구개발 조직인 실리콘밸리의 삼성 리서치 아메리카(SRA)가 각종 고용법 위반 때문에 소송을 당했다.
SRA의 부사장급 한인 임원이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미국 방문 준비 과정에서 피부색이 짙은 직원을 배제하라고 언급해서 유색인종 직원들을 차별했다는 내용이다.
SRA 측은 최근 원고의 고용 계약서 내용 중 필수적 중재 조항에 의거해 소송 대신 중재를 법원에 요청했으나 법원은 지난 8월 25일 이 중재 조항이 불평등하고 일방적이라는 이유로 피고 측의 요청을 기각했다.
북가주 샌타 클라라 카운티 지방법원에 제기한 중국계 전 직원 앤드류 모(38세)는 SRA에서 AI 전문가인 시각지능연구부문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했는데 SRA를 상대로 차별, 보복, 부당해고 소송을 제기했다. 소장은 지난해 12월 2일에 법원에 접수됐고, 원고 측은 징벌적 손해 배상 등을 주장하며 배심원 재판을 요청했다.
소장에 따르면 지난 2021년 11월 SRA가 당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북미 출장을 준비하는 과정이 문제였다. 당시 이 부회장은 가석방 출소 이후 SRA 방문 등 북미 출장을 통해 본격적으로 해외 행보를 시작했었다.
원고 측은 소장에서 “앤드류 모씨는 삼성의 협력사 등과 회의를 하던 중 자신의 상사인 김기호 씨가 직원들에 대한 차별적이고 괴롭히는 행동을 저지른 사실을 알게 됐다”며 “김 씨는 이재용 부회장이 행사에 참석하는 동안 ‘피부색이 짙은 (dark skin)’ 직원들은 행사장에서 나가 차에 앉아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라고 주장했다.
소장에 언급된 김 씨는 SRA에서 시각지능연구부문을 이끄는 상무급 부사장인 것으로 밝혀졌다. 소장에서 원고 측은 “SRA의 사내 괴롭힘 방지 정책에는 차별 행위 등을 알게 될 경우 관리자 또는 상급자에게 정책 위반 사항을 즉시 보고할 의무가 있다는 점이 명시돼 있다”라고 밝혔다.
모씨는 이 정책에 따라 즉시 SRA의 인사 담당 책임자인 인도계 산치타 굽타를 만나 김 씨의 행위를 보고했고, 당시 막 부임한 SRA 노원일 연구소장에게도 해당 사실을 구두로 알렸다고 소장에 적혀있다.
원고 측은 이때부터 모씨에게 회사 측의 보복 조치가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소장에서 원고 측은 “인사과에 보고한 지 일주일 후인 2021년 12월 22일 김 씨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며 “이후 김 씨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고 2021년 12월 28일부터 31일까지 유급 휴가를 사용했는데 인사과로부터 모씨에게 연락이 안 된다며 휴가가 무단결근임을 암시하는 내용의 연락을 받았다”라고 밝혔다.
모씨는 이후 승인받은 휴가계를 증거로 제출했지만, 인사과로부터 특별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 원고 측은 “SRA는 직원 핸드북에 3일 이상 무단결근한 직원을 해고할 수 있다는 정책을 명시했다”며 “인사과가 휴가 기간 모씨에게 연락한 것은 모씨의 무단결근을 증명할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장에 따르면 인사과의 휴가 관련 조사가 있고 난 뒤 2022년 1월 19일 모씨는 SRA로부터 계약 종료 통보를 받았다. 해고 사유에는 부서나 역할 자체가 없어졌을 때 적용되는 ‘역할 제거(role elimination)’라고 명시돼 있었다.
원고 측은 소장에서 모씨가 해고된 이후에도 SRA는 모씨가 담당했던 시각지능연구를 계속 진행했고 동일한 책임의 보직을 유지했으며 새 직원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에 모씨의 해고 이유인 역할 제거라는 명분은 SRA의 구실일 뿐이라며 고 주장했다.
한편 SRA는 소송 대신 중재를 도모하기 위해 모씨의 고용 계약서에 명시된 소송 중재 조항을 근거로 법원에 중재를 최근 신청했다. 하지만 샌타 클라라 카운티 법원의 담당 판사 에빗 페니패커는 지난 8월 25일 SRA의 요청을 기각했다.
그 이유는 원고의 변호사인 ILG 로펌에 따르면 채용 과정에서 모씨가 SRA에 고용 계약서에 포함된 중재 조항을 수정 또는 삭제를 요청했는데 SRA 측은 이에 대해 중재 조항 등은 협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었기 때문이다. 즉, 삼성은 고용 계약 조항에 근거하여 중재를 강제하려 했다지만 법원은 공적 소송을 사적 중재로 강제하려는 신청에 대해 단순히 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판사가 이런 판결을 내린 이유는 SRA는 실제 피해 또는 손해를 입증하지 않고도 회사의 기밀 유지 계약을 위반한 원고에게 ‘예비 금지명령(injunctive relief)’을 신청할 수 있지만, 반대로 직원은 SRA를 상대로 피해 보상 등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사비를 들여 개인적으로 중재인을 고용해야 하는데 이런 실정이 공정하지 않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고용주는 고용 계약을 면밀히 검토해서 중재 조항이 공정하고 집행 가능한지 재검토 및 확인이 필요하고, 고용 계약의 투명성을 위해 모든 조건을 직원에게 명확하게 설명하고 필요할 경우 한국어나 다른 언어로 번역해 줘야 한다.
삼성의 변호사인 세계적인 고용법 로펌 잭슨 루이스는 판사의 이번 판결에 대해 지난 9월18일 항소법원에 항소를 제기해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번 소송은 사실여부를 떠나서 차별을 당한 직원 본인이 아니고 옆에서 이를 목격한 동료 직원도 다른 직원의 차별에 대해 고용주나 상관에게 불평이나 항의 할 수 있고 이에 대해 보복을 당할 경우 소송을 할 수 있다는 면에서 특이하다고 본다.
삼성이 지난 1988년에 설립한 SRA는 지난 2013년 말 지금의 마운틴뷰(Mountain View) 캠퍼스로 자리를 옮겼다. SRA는 삼성의 미래 기술을 개발하는 조직으로 전 세계 각종 인종, 민족들로 구성된 글로벌한 인재들 65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소송을 제기한 모씨는 구글, 크라우드스트라이크 등에서 인공지능 연구 부서 최고 책임자 등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다.
한편 최근에는 SRA의 수십 명 직원이 해고됐다. 지난 9월 25일 미국 현지 업계에 따르면 SRA는 지난 9월 중순, 싱크탱크팀(TTT)과 스타랩스(StarLabs)의 연구진 일부에 해고 통보를 했는데, 총 감원 인력은 약 50명 안팎으로 알려졌다. SRA의 연구원 수는 연초 기준 650명 정도니까 전체 인력의 7% 정도가 해고됐다.
스타랩스는 SRA 산하 연구소로 지난 2020년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인 CES에서 인공 인간 ‘네온’을 공개해 주목받은 바 있다. 해고 대상자는 9월 말까지 근무했고, 퇴직금은 약 6주분의 주급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SRA는 이번 모씨의 소송 외에 이미 지난 6년 사이 고용법 위반 이유 등으로 한국계, 베트남계, 인도계 직원들로부터 수차례 피소된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 2017년 10월에는 부당 해고 혐의로 인도계 직원 자인 자와하(Jain Jawaha)라는 직원이 SRA를 고소했다. 2014년부터 SRA에서 근무했던 원고는 병가를 호소했으나 사측에서 이를 거부했고 결국 소송으로 이어졌다. 이밖에 지난 2017년 11월에는 역시 부당해고라는 이유로 한인 직원 미셸 백이 SRA를 상대로 소송했고, 지난 2021년 2월에는 베트남계 직원 신시아 트랜이 부당해고 소송을 제기했었다.
<노동법 전문 김해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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