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WP가 한국 근대사 배경의 드라마 같은 한 가족사를 신문에 실었다. 긴 기사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독립운동가 증조할아버지 이종욱
우리는 보통 우리의 조상들을 만나는 걸 기대하지 못한다. 유골을 직접 눈으로 보는 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난 보았다. 올해 초 증조할아버지의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 참석하면서다.
그리고는 그 전까지 몰랐던 그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으며 한국인으로써 그와 나의 고유한 삶이 어떻게 한 세기를 이어져 와 마무리됐는지를 깨닫게 됐다.
일제시대 당시 위험한 인물로 무장봉기를 주도하고 투옥된 독립운동가였던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57년간 부산에 있는 작은 가족묘지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을 받았고 지난 4월 유골이 가족 묘지에서 대전 현충원 국립 묘지로 이장되었다. 발굴에서 유골수습, 화장 그리고 안장까지 거치는 모든 걸 지켜 보면서 나는 증조할아버지의 유산을 알아보고 싶었다. 아버지에게서 들은 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은 이종욱.
한국정부의 기록보관소를 찾아 당시 일본 총독부의 조사서류와 재판기록, 진술서 그리고 판결문을 찾은 후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가서 100여년 전의 기록들과 서신들도 확인했다.
그곳에서 증조할아버지가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게 되었다. 증조 할아버지는 당시 울산에 살고 있던 22살의 청년이었다.
그가 속했던 비밀 청년운동가 조직 소속 동지들은 전국적인 3-1운동 시위소식을 듣고 자신들도 울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하기를 계획했다. 4월 어느 날 저녁, 20여명의 청년들이 흰색 비단에 혈서를 작성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기록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축구공을 공중으로 차는 것을 신호로 그들은 울산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금세 100명 이상이 합세했다. 이날 진압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한 5명이 사망했고 증조부와 다른 시위주동자 13명이 체포되어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증조할아버지는 수차례 일본 제국측의 반성문 작성 요구에도 전향하지 않았다. 출소 후 그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1966년 불치병 말기 진단을 받은 그는 남은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자 스스로 곡기를 끊어 삶을 마감했다. 그리고 부산 인근의 가족 묘지에 묻혔던 것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군부 정권을 무너뜨리며 한국 민주화 전환점이 된 1987년 6·10 민주 항쟁의 날 결혼하셨고 이듬해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때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7살 때 가족이 괌으로 이민 온 후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나 자신을 완전한 한국인이라고 느껴본 적도 없었고 그러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한국 국적도 포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WP 뉴스 기자로서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한때 나의 증조할아버지를 지지했거나 반대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했던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이런 나의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강제로 배워야 했던 일본어를 나는 직업적 필요에 의해 스스로 공부하고 있다. 한일 양국은 과거 식민지 시대의 역사적 갈등을 극복하려하고 있고, 나는 미국인으로서 이를 목격하며 그들을 취재하고 있다.
유산이란 기억이다. 이 기억은 우리 시대를 초월해 우리 후손들 몇 세대까지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기억이기도 하다. 증조할아버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가 이 모든 사실을 안다면 다시 한 번 들불같은 분노를 내게 표할 것인가? 아니면 이해해주실까?
이 기사를 쓴 미셀 예희 리(Michelle Ye Hee Lee) 기자는 현재 WP 도쿄 지국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