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학입학 제도의 불공정성 문제가 주요 의제로 등장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입 제도가 ‘조변석개’하는 한국에서야 대선 때마다 대입제도 이슈가 후보들의 단골 공약으로 나오는 것이 상례 이지만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대학입학제도 문제가 이슈화 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특히 이 문제가 미국사회의 공정성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다뤄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태풍의 눈으로 부상하고 있는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 시장이 명문대학 입시의 공정성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동문 자녀들에게 특혜를 주는 제도인 ‘레거시 입학제도’ (Legacy Admission) 폐지라는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공약을 내건 것이다.
블룸버그 전 시장은 ‘레거시 입학제도 폐지’를 자신의 주요 교육정책 공약으로 발표하면서 “미국 대학 입학제도의 공정성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학입시, 특히 하버드대학 등 아이비리그 명문 사립대학들의 입학제도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계층간 양극화가 콘크리트처럼 고착화되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명문대 입학이 몇 남지 않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공정한 대학입학제도는 이 사다리를 걷어 차버리는 것이며 자신들의 위치를 더 공고히하고 현상을 고착시키려는 상류층 이너서클의 중요한 전략 중 하나가 된다. ‘레거시 입학제도’라는 불공정한 제도의 최대 수혜자들이 바로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백인 상류층 가정의 자녀들이고, 반면 가장 큰 피해자들은 한인 등 이민자나 돈 없고 ‘빽’ 없는 가난한 유색인종 또는 하층민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수재로 알려졌지만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하버드대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대학을 졸업한 돈 많은 아버지의 배경 때문이었다. 사실 그게 전부였을 수 있다. 1935년 하버드대에 지원한 케네디는 입학원서 첫 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하버드 1912년’. 당시 하버드는 입학원서 첫 페이지에 아버지가 졸업한 대학을 기록하는 항목이 있었다. 성적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케네디는 하버드 입학에 성공했다.
재임기간 내내 엉터리 문법과 스펠링 때문에 자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사실 아이비리그 최고의 명문 예일대를 졸업했다. 물론 실력 때문은 아니었다.
영국 가디언지는 지난 2019년 힘 있는 백인 부자 자녀들에게 특혜를 주는 엘리트 대학들의 ‘레거시 입학’을 통렬히 꼬집은 기사에서 부시와 케네디의 사례를 지적했다. 가디언은 부시의 고교성적은 보잘 것이 없었고, 케네디는 어느 과목 하나 특출난 게 없었다고 지적했다.
상류층 백인 ‘도련님’들의 당연한 특권이라 여기며 별다른 문제 제기조차 하지 않던 미국인들이 이 ‘레거시 입학제도’의 불공정성에 주목하게 된 것은 하버드대 입학이 거부된 한인 등 아시안 학생들이 제기한 차별소송이 계기가 됐다. 이 소송과정에서 그간 감춰져왔던 하버드대학 입학사정의 불공정한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문서에 따르면 ‘레거시’ 지원자들의 합격률이 이 대학 전체 합격률 6%보다 무려 5배 이상 더 높은 33%로 나타났다.
더 놀라운 것은 하버드대에 입학한 백인 학생의 21.5%가 레거시 입학자인 것으로 드러난 것. 하버드 백인 학생 5명 중 1명이 실력이 아닌 할아버지, 아버지 후광으로 입학한 셈이어서 레거시 입학제도가 ‘미국판 음서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듀크대 피터 아치디아코노 교수 분석에 따르면 백인과 달리 흑인 학생의 레거시 입학비율은 4.79%에 불과했고, 한인 등 아시안 학생 비율은 6.63%에 그쳤다.
하버드대학을 상대로 입학차별 소송을 벌이고 있는 ‘공정한 입학을 위한 학생들’(Students for Fair Admissions)이 법원에 제출한 자료도 놀랍다. 이 단체는 2000년부터 2015년까지 하버드대에 지원한 약 16만명의 입학사정 자료와 2003년부터 2013년 입학허가를 받은 학생 자료를 분석한 결과 ‘레거시’로 입학한 학생 수가 레거시가 아닌 방식으로 입학한 학생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명문 사립대들이 당연시하는 기부금 입학제도 역시 대표적인 불공정한 입학제도이다.
거액의 기부금을 내고 명문대에 입학한 부유층 자녀들의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트럼프의 사위 제러드 쿠슈너 백악관 고문은 부동산 갑부 아버지가 1998년 250만달러 기부를 서약한 직후인 1999년 하버드대에 입학했고, 모교인 프린스턴대에 3,000만 달러를 기부하고 두 아들을 입학시킨 이베이의 전 CEO 메그 휘트먼의 사례도 있다.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는 양극화 문제 해결의 단초는 기회의 공정성 회복에서 찾아야 하며, 대학입학 제도의 공정성 확보가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김상목 K-News LA 대표기자 겸 편집인>
♠이 글은 미주 한국일보 2020년 2월 21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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