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유 속담인지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지극히 정치적이고 이념적이며 논쟁적인 담론인 것 만큼은 사실이다.
유래한 연원을 알지 못하지만 이 말의 존재는 ‘개천에서는 그만큼 용이 나오기 힘들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 번 생각해 보라. 개천에서 용이 나올 리가 있는가.
얕디 얕은 수위로 ‘쫄쫄쫄’ 흐르는 개천물에서 용이 자라고 있다거나 개천서 살던 ‘이무기’가 용이 돼 승천할 수 있겠는가. 본시 개천에는 미꾸라지나 송사리, 피라미가 살고 있는 것이 맞다. 개천에서 나온 용을 자처하지만 실은 ‘미꾸라지’인 이무기 정도가 있거나 자신의 출신을 개천으로 포장하려는 용이 있을 수는 있겠다.
모름지기 용이 나오려면 시퍼렇게 깊은 수심과 도도하게 흘러가는 풍부한 수량이 있어야 한다. 양자강이나 황하, 한강쯤은 되어야 용이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라도 품게 되는 법이다.
‘개천 용타령’이 이념적이며 논쟁적인 것은 이 담론이 계층 이동의 신화를 만들어내는 현상태를 고착화하려는 상류 부유층의 방어적 담론이어서다. 비루한 현실에 살지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며 노력하지 않는 개인의 게으름을 비난하는 소위 ‘노력 담론’. 또는 그만큼 용이 되기 어려우니 현실에 만족하라고 점잖게 타이르는 ‘자격 담론’이 바로 ‘개천 용 타령’이다.
갑자기 ‘개천 용 타령’ 장광설을 늘어놓는 이유가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난다’는 쉰 소리조차 농담 삼아 꺼내기도 힘들 만큼 양극화가 급속도로 진행돼 몸집을 키운 미꾸라지나 송사리, 피라미들이 개천을 떠날 수 있는 ‘바늘구멍’ 조차도 차단되고 있다는 사회적 징후(Social Symptons)들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100년 한국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오스카 수상작 후보에 오른 영화 ‘기생충’이 미국인들에게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이 영화가 이같은 사회적 징후들을 잘 포착해냈기 때문이다.
양극화로 인해 나타난 한국의 현실을 그린 이 영화 속 ‘반지하 가족’의 현실이 계층 이동의 꿈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미국 사회의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는 공감대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반지하 가족이 ‘반지하 냄새’를 털어내고 지상으로 올라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영화 ‘기생충’이다.
지난해 미국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미국 부유층들의 입시비리 스캔들도 그렇다. 재벌급 연예인 스타들과 부유층의 밑바닥 위선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지만 빈곤층 학생들이 계층상승할 수 있는 스포츠 특기생 바늘구멍조차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현실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150만달러에 예일대 특기생 입학을 따낸 부자나 50만달러에 두 딸의 USC 입학을 받아낸 이들을 반지하가 이길 수는 없다.
대한민국 최고의 학벌 배경에다 부와 권력까지 쥐고 있는 조국씨 부부가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대학에 자녀들을 입학시키기 위해 갖은 편법과 수단을 동원한 분투기를 그린 조국 사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조국씨 부부가 동원한 각종 편법 신공을 보면서 ‘개천’에 사는 한국의 흙수저 젊은이들이 느꼈을 좌절과 분노 역시 미국의 개천에 사는 밀레니얼의 좌절과 다르지 않다.
계층 이동의 희망을 품기 어려운 기회가 막힌 극심한 양극화 미국 사회에서 밀레니얼 젊은이들이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버니 샌더스에게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018년 갤럽 조사에서는 미국의 밀레니얼 젊은이 51%가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선호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월 악시오스의 조사 결과는 더 극단적이다. 18세∼24세 미국 젊은이의 58%가 ‘자본주의 보다는 사회주의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계층 이동의 문이 닫혀 버린 사회가 안고 있는 변화를 향한 잠재적 폭발력이 강하게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이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극단적인 스토리로 보여주지만 사실 양극화의 현실은 한국 보다 미국사회가 더 극심하다. 한국과 달리 미국사회는 계층에 따라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양극화 현실에 대한 체감도가 떨어질 수 있지만 실제는 미국에서 더 극단적인 양극화가 나타난다.
상위 1%의 최상층 부자들이 가지고 있는 부를 국가별로 따져보면, 한국은 12.1%로 중국(13.9%) 보다 낮고, 일본(10.4%), 영국(11.7%)보다 높다. 반면 미국은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20.2%를 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한국에 비해 양극화 실태가 더 심각하다. 빈부격차가 극단적이라는 브라질이 28.3%로 조사됐다.
‘노력하면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다’며 개천 사는 송사리나 미꾸라지를 비난하지 말고 용이 나올 수 있게 개천을 바꾸려는 사회적 노력이 앞서야 양극화를 타개할 실마리도 찾을 수 있다. 개천을 바꾸는 것이 먼저다.
<김상목 K-News LA 편집인 겸 대표기자>
♠이 글은 2020년 1월 미주 한국일보에 실렸던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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