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싱가포르에서 유학하고 있는 중국인 A(26)씨는 지난해 가을 방학을 맞아 중국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그의 가방에는 옷과 신발 외에도 엔비디아의 고급 인공지능(AI) 칩 6개가 들어있었다.
대학 친구로부터 ‘미국이 중국으로의 칩 수출을 제한했기 때문에 칩을 가져오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각 칩은 닌텐도 스위치 게임 콘솔 크기 정도였고, A씨는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은 채 공항을 통과했다.
이후 A씨는 칩 하나당 100달러(약 13만8960원)에 팔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는 중국 지하 시장 거래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짚었다.
미국이 AI 반도체 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막기 위해 수출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이 공급망 사각지대를 이용해 엔비디아의 고급 칩을 밀수하고 있다고 WSJ가 2일(현지시각) 보도했다.
WSJ은 이날 ‘중국에 엔비디아 칩을 몰래 들여오는 지하 네트워크’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엔비디아 고급 칩 밀수 현장 탐사보도물을 게재해 이 같은 사례를 소개했다.
WSJ는 “미국이 중국이 엔비디아의 고급 AI 칩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규제책을 펼치고 있는데, A씨는 이를 우회하는 구매자, 판매자 및 택배기사 네트워크의 일부”라고 말했다.
미국과 중국 간 기술 경쟁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엔비디아의 고급 칩은 이 경쟁에 핵심 요소인 AI 시스템을 훈련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다.
AI 반도체 선두 주자인 엔비디아는 AI 모델 학습에 필수 반도체인 AI 가속기 시장의 약 98%를 장악하고 있으며, 그 핵심 부품인 그래픽 처리 장치(GPU)의 약 80%를 점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미국은 중국이 엔비디아 등의 AI 칩을 무기 개발 및 해킹에 사용해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며, AI 칩 수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2022년 8월께 엔비디아 등을 대상으로 최첨단 칩 중 A100·H100 등 특정 칩을 중국으로 수출하기 위해선 미국 정부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규제를 발표했다.
또 미국은 다음 달 초 엔비디아 등이 허가를 먼저 받지 않고도 중국 기업에 칩을 판매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도 취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규제로 수입 길이 막힌 중국은 이른바 ‘지하 네트워크’를 통해 엔비디아의 고급 칩을 들여오고 있는 것이라고 WSJ는 밝혔다.
실제 WSJ는 중국 내 70개 이상의 유통업체가 수출 제한 품목에 해당하는 고급 칩을 온라인에 공개적으로 광고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 이 매체는 그중 25개 업체와 연락을 취했고, 이들로부터 ‘매달 수십 개의 고급 엔비디아 칩을 팔고 있다’고 들었다.
이들 업체는 사전 주문을 받아 몇 주 내로 배송을 완료했다. 일부는 서버 전체를 판매했는데 가격이 약 30만 달러(약 4억1667만 원원)에 달했고 각각 8개의 고급 엔비디아 칩이 들어있었다.
WSJ는 “이런 상인들은 빅테크 기업 수요를 충족시킬 만큼의 강력한 엔비디아 프로세서를 판매하지 않는다”며 “그러나 더 적은 수요를 가진 AI 스타트업이나 연구 기관들을 상대로 거래를 한다”고 말했다.
또 싱가포르의 브로커 ‘브라더 장'(Brother Jiang)은 동남아시아의 유통 채널과 시스템 통합업체의 연락처를 활용해 중국 고객이 칩과 서버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고 WSJ에 말했다.
그는 자신의 고객 중에는 AI 기업, 연구 기관, 칩 리셀러(재판매자) 등이 있으며, 이 중 일부는 미국 규제를 피하기 위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베트남, 대만에 설립된 법인을 이용했다고 전했다.
WSJ는 “모든 엔비디아 칩은 중국에 중요한데, 중국은 기술 주권과 국가 안보에 있어 점점 더 중요해지는 AI 경쟁에서 미국과 경쟁을 유지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