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서 너구리는 변신과 속임수의 상징이었다. 20세기 초 도쿄의 백화점이 이 이미지를 활용해 ‘가격이 바뀐다!’는 광고를 내걸자 사람들은 호기심과 흥분에 이끌려 몰려들었다. 판매장을 가득 메운 군중은 통제 불능에 가까워졌고, 결국 경찰이 진압에 나섰으며 매장의 구조물이 손상될 정도로 혼란이 컸다. 단지 가격이 ‘오늘만 다르다’는 말 한마디가 만들어낸 열광이었다. 이 ‘너구리 세일’ 사건은 소비자가 어떻게 환상에 쉽게 이끌리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준 사례다.
이러한 대할인판매의 대표적인 것이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다. 헌데 이 말은 사실 경제 붕괴가 있었던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1869년, 미국 금융시장을 뒤흔든 금 투기 조작 사건으로 시장은 폭락하고 국가경제가 흔들리자 언론이 이 재앙의 날을 그렇게 불렀던 거다.
그런 재난의 의미를 가진 말이 어이러니하게도 시대를 지나면서 오늘엔 ‘소비축제’의 이름으로 변신했다. 소매업계가 ‘적자(red)’에서 흑자(black ink)’로 전환되는 날이라고 마케팅적으로 재해석 홍보하면서다.
해서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블랙 프라이데이에 캠핑카와 텐트를 치고 줄을 서는 장면, 각종 플랫폼이 ‘오늘만 이 가격!’이라고 내거는 팝업 광고들은 그 옛날 광경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인간의 소비 심리는 시대를 바꿔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거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할인’이라는 행위는 원래 지금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영어 ‘discount’의 본래 뜻은 ‘불리하게 만들다(dis + count)’였다.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치는 거래상의 조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단어의 뜻은 변했지만, 오늘의 대규모 할인 행사를 들여다보면 이 옛 의미의 그림자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소비자는 ‘싸게 산다’는 만족, 하지만 동시에 ‘지금 사지 않으면 손해 본다’는 압박 속에서 필요 이상의 소비를 하게 되고, 기업은 재고를 털어내며 더 큰 이득을 챙기는 것이다.
누가 불리해지고 누가 유리해지는지 그 경계는 흐려졌지만, 할인이라는 행위에 숨어 있는 심리적 압박은 여전해 보인다. 그런데 이 심리의 배경에는 20세기 중반 미국 기업들이 추진한 ‘계획적 노후화’ 라는 전략이 숨어 있다.
GM과 듀폰은 제품이 오래 사용되면 경제가 정체된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제품의 수명을 고의로 줄이거나 매년 디자인을 살짝 바꿔 ‘작년 모델은 촌스럽다’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사람들은 기능상의 필요가 없어도 새 모델을 구매했고, 그 결과 버려지는 제품과 포장재는 급증했다. 소비와 폐기, 그리고 다시 소비의 순환이 가속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거다. 오늘날 블랙프라이데이가 끝나면 물류창고에 산처럼 쌓이는 박스와 플라스틱, 반품된 상품들을 보면 이러한 순환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은 왜 블랙프라이데이 같은 대규모 할인 이벤트를 반복할까? 단순히 많은 고객을 끌어모으기 위함만은 아니다. 재고를 줄이고, 데이터를 확보하고, 브랜드 주목도를 상승시키며, 소비자 심리를 자극하는 등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결국 기업에게 할인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 더욱 큰 판매와 더욱 빠른 소비 순환을 작동시키는 전략이다. 소비자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여기지만, 종종 ‘싼 가격이 만들어낸 필요’에 반응하고 있는 거다.
블랙 프라이데이. 단지 값싸게 쇼핑하는 즐거움의 날인지, 아니면 우리를 조용히 휩쓸고 지나가는 하나의 거대한 심리 마케팅 시스템인지를 생각케 한다. 과연 ‘우리가 사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진 필요에 반응하고 있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