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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천 타임스케치] 트럼프와 펠로시, 조커와 배트맨

2025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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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천 칼럼니스트

흔히 소설이나 영화같은 작품을 보면 ‘정의의 사도’와 ‘악인’이 등장한다. 선과 악의 극명한 2분법이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선과 악의 적(敵)은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가 된다.

예를 들어, 조커가 없었다면 배트맨이 과연 필요했을까? 반면 조커는 배트맨으로 인해 더욱 확실한 ‘악의 화신’으로 부각될 수 있는 것, 서로의 거울인 셈이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역사적으로는 선과 악의 흑백논리가 아닌 ‘악연’으로 만나는 적(敵)이 있다. 로마의 시이저와 키케로, 중국의 항우와 유방, 그리스의 페리클레스와 클레온 같은 경우다. 이들 또한 끈질긴 대립 속에서 한쪽이 없었다면 다른 한쪽이 남아있지 못했을 그런 관계로 서로의 존재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고 역사를 바꾸기도 했다.

항우가 유방을 몰아내려 한 전쟁은 결국 새로운 왕조를 열게 된 반면, 키케로는 시이저를 비난하던 연설로 공화정의 몰락을 끝내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시이저를 비판함으로써 자신은 ‘공화정의 수호자’가 되고, 시이저는 키케로의 공격을 받으면서 오히려 ‘새 질서의 창조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처럼 정치에서 ‘적(敵)’은 단순한 반대편이 아니라 그로 인해 자신의 위치가 선명해지는 그런 상대인 거다. 그런 가운데 ‘악연’은 역사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비록 그들의 싸움이 피와 음모로 얼룩졌다해도 그 대립이 있었기에 한 시대의 질서가 다음 시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 오래된 법칙은 오늘날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미국 정치의 최근 몇 년을 흔든 트럼프와 펠로시의 관계가 바로 그렇다. 둘은 모든 면에서 정반대였다. 트럼프는 제도 밖에서 온 반항자, 이방인이었고, 펠로시는 체제 안에서 질서를 지켜온 상징이었다.

펠로시 트위터

한 사람은 혼란을 무기로 삼았고, 다른 한 사람은 절차와 규범을 방패로 들었다. 즉, 트럼프는 ‘워싱턴 정치의 썩은 중심’을 공격하며 자신을 체제 밖의 인물로 만들었다. 헌데 그가 그렇게 ‘반체제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를 막으려는 ‘체제의 얼굴’, 펠로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의회의 전통과 미국 민주주의의 규범 그 자체를 상징했다.
그러니 트럼프에게 그녀는 단순한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 싸워야 할 세계였던 거다.

결국 펠로시가 있었기에 트럼프는 ‘체제 밖의 상징’으로 완성되었고, 트럼프가 있었기에 펠로시는 끝까지 ‘체제의 품격’을 지키려는 인물로 남게 된 것. 이같은 그들의 악연은 서로를 깎아내리면서도, 서로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일종의 묘한 공생관계였던 셈이다.
헌데 그 싸움의 다른 한쪽 끝에는 법과 정의의 마지막 언어였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BG)도 있었다. 그녀는 병(病)을 안고도 대법관 자리를 지켰다. ‘트럼프에게 내 자리를 내어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마지막까지 법의 균형추를 지키려 했다. 그 결심은 단순한 개인의 신념이라기 보다는 체제를 지켜내기 위한 마지막 소명 같았다. 그녀의 죽음은 하나의 인물이 사라진 사건이 아니라 제도의 한계를 마주한 순간이었던 거다.

그리고 이제 펠로시도 은퇴를 결심했다. 그녀는 몇 차례 은퇴를 미루며 트럼프의 재등장을 막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물러난다고 한다. 아마도 이제는 그 싸움의 무게가 제도 밖의 개인에게서 제도 자체로 옮겨졌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해서 그녀가 손을 놓아도 체제가 스스로 버틸 만큼 견고해졌다고 믿어서일까?

결국 긴즈버그와 펠로시가 트럼프와 끝없이 싸우며 체제 안과 밖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 애쓴 덕에 그들의 충돌은 파괴처럼 보였겠지만 제도는 재정비되고 더 단단해진 셈이랄까. 그리고 어쩌면 그들은 그 격렬한 불화 속에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강한지를 증명한 한 시대의 인물들로 남게 될는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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