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DC에서 시간당 20달러 이하로 돈을 받고 일하는 카펫 청소부 본 스미스(46)는 37개국어를 구사한다. 이중 25개국어는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다.
외국 대사관이 즐비하고 국제기구들도 많은 워싱턴에서 통역사들은 보통 수십만 달러의 연봉을 받으며 일하지만 웬만한 통역사는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초다국어능력자인 본은 카페트 청소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미 워싱턴포스트(WP)가 5일 그의 인생 스토리를 소개했다.
본은 8개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24개국어는 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수준이며 8가지 종류의 문자와 문장을 읽고 쓸 수 있다. 이탈리아어, 핀란드어, 미국어는 수화로 대화도 할 수 있다. 멕시코 나후아틀 원주민과 미국 몬타나 샐리시 인디언 언어도 공부하고 있다. 네덜란드어와 카탈루냐어로 대화할 때는 그의 발음에 원어민이 깜짝 놀랄 정도다.
초다국어능력자(hyperpolygots)는 최소 11개국어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다. 사용 언어가 많아질수록 그런 사람수가 크게 줄어든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습득 능력엔 한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본은 남들보다 이름, 숫자, 날짜, 소리를 더 잘 기억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도 모른다. 다만 평생을 여러 언어를 배우는데 몰두했다.
어릴 적 본은 세상엔 아버지가 사용하는 영어와 어머니가 사용하는 스페인어 등 두가지 언어만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는 멕시코 오리자바에 있는 외가를 자주 방문해 스페인어가 입가에 맴돌았지만 메릴랜드주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색과 다른 백인 학생들 앞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면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벨기에에서 아버지 친구가 집에 온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 친구는 본이 전혀 모르는 언어로 대화했고 본은 짜증이 났다. 그 때부터 본은 새로 접하는 모든 언어에 입문했다. 어머니 레코드 앨범에서 불어를, 아버지 일터에서 독일어 사전을, 고등학교에선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친구를 접했다. 러시아 친구를 만난 뒤 본은 도서관에서 초등 러시아어 교본을 구했다.
얼마 뒤 수퍼마켓에서 러시아 여성을 만났을 때 러시아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자 여성이 행복해하는 표정을 봤다.
학교 선생님들은 본에게 실망스러워했다. 책을 읽으라고 지명될 때마다 엉뚱한 곳을 읽기 일쑤여서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전화해 집중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본을 이혼해 따로 살고 있는 어머니에게로 보냈다. 본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산드라 바르가스는 “그 때 본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 몰랐다”고 지금 말한다. 이혼한 20대 어머니로 본과 동생을 낯선 외국에서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본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해 정신과에 데려가 상담했다. 의사는 본이 “너무 너무 똑똑하다”고 했다.
그러나 본이 자라면서 똑똑한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고 어머니는 생각하게 됐다. “머리만 좋으면 좋지만 마음이 여린 게 문제였다”고 말했다. “너무 예민해서 본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14살 때 본은 다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다. 대사관이 즐비한 워싱턴 DC 텐리타운의 아파트 지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윌슨고등학교엔 전세계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고 각기 자기 나라 말을 사용했다. 본이 곧장 빠져 들었다.
브라질 학생반에서 포르투갈어를 루마니아 남매에게서 배웠다. 본은 글쓰기 물론 배우는 것마다 몽땅 외웠다. 수줍어하는 에티오피아 소녀에겐 암하라어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주말마다 버스를 타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기념 도서관으로 가서 언어교본을 탐독했다. 본은 책을 읽으면 곧장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주초에 다시 학교에 나갈 때마다 더 많은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아무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과 소통한 것이다.
17살 때 다시 어머니와 합쳤다. 러시아어 수업을 들은 적이 없지만 최상급반에 붙었다.
그의 학력은 고졸이다. 진로상담사가 의료보조원 전문학교 진학을 권해 잠시 생각했지만 곧장 포기했다고 했다. 이후 그는 페인터, 기도, 펑크록 거리 공연자, 콤부차 행상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다가 곧장 접기도 했다. 카페트 청소일을 시작하기 전 친구와 함께 사무실 건물 유리창에 선팅하는 일도 했다.
그러던 중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미망인인 체코 출신 예술품 수집가 메다 믈라드코바의 개를 산책시키게 됐다. 그곳에서 그는 다국어 능력을 한층 발전시킬 수 있었다. 조지타운의 자택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동유럽 각국 사투리를 사용했고 본도 그렇게 됐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본은 한번도 언어능력시험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언어를 배울수록 언어를 “안다”는 것이 단순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능숙하다”거나 “대화가 가능하다”는 평가가 흔히 사용되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수준인지를 확인할 만한 보편적 기준은 없다. 각국 정부나 교육기관에서 개발한 언어능력시험은 공식적 상황에서의 언어 사용 능력만을 검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일상적 속어나 감정 표현어를 모르면 그 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휘력, 문법, 아니면 발음 중 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1990년 유럽에서 가장 많은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찾기 위한 경연이 열린 적이 있다. 참가자들은 원어민과 짧게 대화하고 능숙도 점수를 받았다. 우승자는 스코틀랜드 출신 오르간 연주자 데릭 허닝으로 22개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9년 사망할 때까지 8개 언어를 더 배웠다고 한다.
허닝의 기네스북 기록은 59개국어 사용자의 등장으로 갱신됐다. 그러나 새 능력자는 몇가지 언어로 TV에서 질문을 받았으나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그가 거짓말쟁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긴장해서 그랬다는 사람도 있었다.
유명 초다국어능력자들은 흔히 “얼마나 많은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질문을 거부한다. 언어를 배우는 것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무시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6개국어 이상을 말하는 400명 이상을 연구해 “바벨탑은 없다”라는 책을 펴낸 마이클 어라드는 이들이 언어 능력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본도 마찬가지였다. 국제 다국어능력자회의를 개최한 리처드 심코트에게 본을 소개하자 본은 웨일즈어, 불가리아어, 세르비아어, 노르웨이어 등 10개국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본으로선 언어는 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스토리일 뿐이었다.
그는 트랙스라는 클럽에서 갈루뎃대학교 학생들에게 미국 수화를 배웠다. 일주일에 한번 어항을 청소한 일식당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조카딸이 샐리시어로 닭이라는 단어를 듣고 재미있어 하자 함께 배웠고 플랫헤드 인디언 보호구역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가 돼 몬타나 알리로 두번 찾아간 적도 있다. 동부지역에 사는 본이 샐리시어를 정확하게 발음하는 걸 보고 밴스 홈 건 선생이 깜짝 놀라기도 했다. 홈 건은 “우리 부족 중에서도 샐리시어를 제도로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학교에서 배우거나 노인들과 오랜 시간을 보낸 적도 없는 본이 그렇게 말하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본은 사람들이 인생을 꾸려온 언어로 그들과 사귀려고 애쓴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받아들이고 감사해했다.
파라과이어 특수학교 선생과도 그렇게 만났다. 본을 뉴욕의 집으로 초대해 과라니어를 가르쳐주고 자신이 가르치는 자폐아동들에 대해 대화했다.
본은 그 선생이 일부러 발음을 굴리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선생은 자폐의 특성을 설명한 것이었고 본은 그걸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본은 자기가 어릴 적 선생님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이유가 이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가 무례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나 재능을 활용해 돈을 벌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는 단지 보다 그럴듯한 직업을 찾는 방법을 모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해봤지만 소용없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즐겨찾는 메인주 바하버 휴양지에서 산 티셔츠 10장을 교대로 입는 것이 편하다. 시간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 멕시코에 사는 여자친구와 마음껏 통화할 수 있는 것이 행복하다. 페인트칠, 모델 기차 조립, 사진 인화, 친구와 고기 굽기, 파킨슨병을 앓는 어머니를 언제든 병원에 데려갈 수 있는 걸 좋아한다. 무엇보다 커피숍에서 에스프레소 4잔을 마시면서 사람들 말소리를 듣다가 새로 사귈 사람을 찾는 것을 좋아한다.
학위와 계급과 신분을 어느 곳보다 중시하는 미국 수도에서 카펫 청소 일을 시작한 뒤 본은 얼룩이 안빠졌다며 호통을 치는 사람들을 종종 마주쳤다. 한번은 한 부부가 포르투갈어로 본이 제대로 일을 못한다고 한참동안 흉보고 있었다. 본은 어릴 적 자신이 선생님을 실망시킨 것도 마찬가지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대 청년이라면 팔뚝에 아르메니아어로 “복수”라고 문신을 했을 터이지만 46살의 본은 달리 복수했다.
본과 함께 일하는 동생이 부부에게 물었다. “어느 나라분이세요?”라고 묻자 남편이 포르투갈이라고 답했다. 본이 “지난 주 포르투갈 대사관 청소를 했다”고 포르투갈어로 상냥하게 말했다. 그 남자 얼굴에 나타난 표정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다.
본은 “MIT 두뇌+인지과학”이라고 쓴 사무실을 방문했다. 러시아 출신 신경과학자 에벨리나 페로렌코가 본과 같은 사람을 연구하는 곳이다. 발달 장애나 뇌졸중으로 언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뇌변화를 주로 연구하는 곳이다. 페도렌코 박사는 이들과 정반대에 있는 다국어능력자 및 초다국어능력자의 뇌가 보통사람과 어떻게 다른 지에도 관심이 컸다.
한 박사과정 학생이 안내하면서 히로나 출신이라면서 카탈루냐어를 한다고 해 반갑다고 했다. 그러자 본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렸다. 15년 전 그에게 카탈루냐어를 가르쳐준 친구에 대해 한동안 카탈루냐어로 떠들었다.
다국어 능력자인 사이마 말릭-모랄레다가 본과 농담을 주고 받으며 본의 발음이 정확한 것을 알아챘다. 그는 원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다국어 능력자가 된 경우였다. 다른 다국어 능력자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말이다. 어머니에게 스페인어를 배웠고 캐시미르어와 힌두어, 우르두어를 아버지에게 배웠으며 영어를 부모에게, 카탈루냐어를 학교에서 배웠다. 불어와 아랍어만 별도로 배웠다.
이처럼 두 사람은 배움의 이유가 달랐지만 연구소는 그 이유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단일어 사용자와 다국어 능력자의 뇌가 어떻게 다른지만 연구한다.
본은 2시간 동안 각종 시험을 치르면서 MRI 검사를 받았다. MRI 기계에서 2초 간격으로 본의 두뇌 입체영상을 촬영했다. 모든 영상에서 활성화된 두뇌 영역이 표시됐다. 자극받은 부위가 산소를 필요로 하기에 혈액이 유입되는 장면이다. 연구자들은 본 두뇌의 어느 부위가 언어 사용에 이용되는 지를 정확히 찾아냈다. 본의 두뇌에서 언어 영역이 남들보다 매우 크고 활성화돼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정반대였다. 이같은 현상은 다른 초다국어 능력자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연구자들이 말했다. 언어를 효율적으로 사용해 많은 산소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은 MIT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친구에게 전화로 “리투아니아어를 배워야겠다”고 했다. “카탈루냐어와 스페인어, 러시아어, 그리고 한국어도 조금”이라고 했다. 그는 하룻새 만난 연구자들과 커피숍에서 만난 외국인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연구 대상이 된 것에 대해 기분이 어떻냐고 묻자 “내가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네”라고 답했다. 그리곤 휴대전화를 꺼내 ‘웨일즈어 330일 완성’ 앱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