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한국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금전만능 풍조가 만연해지면서 돈을 따라 서울로 모여들지만 그럴수록 인간적인 관계는 단절되고 소외감과 고독감만이 깊어져갔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잘 그려낸 작가 중에 김승옥(金承鈺)이 있다.
서울대학교 불문과 재학 중에 ‘생명연습’으로 문단에 등장한 후 발표한 ‘서울, 1964년 겨울’이 많은 화제를 낳았다. 그리고 이어 타락한 욕망과 이기주의로 상처받은 사랑과 인간관계를 다룬 ‘무진기행(霧津紀行)’을 발표함으로써 가장 뛰어난 미학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주인공은 동거하던 여자가 떠나버리자 남편을 잃은 제약회사 사장 딸과 결혼해 전무자리로의 승진을 보장받는다. 사랑보다는 재물과 지위를 따른 세속적 선택이었던 거다. 하지만 위선과 속된 이기주의 서울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고향인 안개의 도시, 무진(霧津)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음악 여교사와 일탈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엔 부귀를 좆아 여인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가상의 도시 무진의 모습은 이렇게 시작한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 싸고 있는 것이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고.
안개는 손으로 잡을 수 없지만 존재하는 것으로 이에 갇히면 모든 것을 정지시킨채 사람과 사람 사이도 단절시키고 가두는 일종의 차단벽으로 이로 인한 외로움과 권태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고 퇴폐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럴수록 보이지 않는 그 너머의 것을 찾으려는 의지를 내재하기도 한다. 일종의 ‘몽환적인 안개 효과’라고나 할까?
김수용 감독은 이 소설을 ‘안개’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었다. 이 때 16살의 정훈희는 이봉조 작곡의 동명의 주제가 ‘안개’를 부르면서 일약 스타로 발돋음했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헌데 흥미로운 사실은 1970년 제1회 도쿄 국제가요제에서 ‘안개’가 ‘월드 베스트 10’에 뽑힐 때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 그룹 아바는 당시 입상권에서 벗어났다고 하니 이때 이미 K팝의 미래가 예견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 후 이 노래는 국내는 물론 프랑스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 등 외국 가수들까지 리메이크해 잇달아 발표하는 현상도 낳았다.
아무튼 다시 55년이 흘러 이 노래에 매료되고 영감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지난75회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이 작품은 변사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와 용의자 사이의 사랑 얘기다. 영화 포스터의 문구처럼 ‘짙어지는 의심’이 ‘깊어지는 관심’으로 변하고 예측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랑이 가능하도록 한 것은 다름 아닌 안개 효과였던 셈이다.
그러고 보니 노래와 영화처럼 연인들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듯 오늘의 세상사 모두가 안갯속,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노래는 이렇게 이어진다.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여담이지만 영화가 끝나도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엔딩 크레딧이 이어지는 배경에 흐르는 정훈희 송창식의 듀엣 ‘안개’ 새 버전이 주는 감동 때문이라는 찬사가 나온다. 흘러온 세월만큼 노래에서 연륜과 깊이가 느껴져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영상과 노래의 일체감이 훌륭하다는 평가 만큼이나 몰입도가 높아서일 게다.
각설하고 언젠가 안개가 걷히고 나면 모든 것이 선명해지기는 할 것일까? 아무래도 이젠 이 깊고 짙은 안개와는 ‘헤어질 결심’을 하고 암울함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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