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0년 전, 영국 시인 초서(Geoffrey Chaucer)는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이렇게 밀했다.
‘4월의 달콤한 소나기가 3월의 가뭄을 뚫고 땅속 깊이 스며들어 꽃을 피운다.’
그에게 4월은 순례자들이 길을 나서는 달, 겨울을 이겨내고 다시 살아나는 달이었다. 봄비가 내리면 씨앗이 트고,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성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600년이 지나 T. S. 엘리엇은 그 구절을 살짝 비틀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유럽의 폐허 위에서 그는 썼다.
‘4월은 잔인한 달.’ 언뜻 정반대의 말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4월이 본래 ‘소생의 달’이라는 것을 엘리엇도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거다. 수백만 명이 전장에서 쓰러졌는데,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다시 봄꽃을 피워내고 있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데, 봄만 혼자 돌아오고 있다. 그래서 잔인하다고 말이다.
지난 2월 28일, 오만의 중재로 이어지던 미국과 이란의 핵협상이 타결 직전이었다. 이란은 핵물질 비축량을 최소 수준으로 낮추겠다고 동의했고, 외교적 해결의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협상 테이블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투기들이 이란 상공을 가로질렀다. 그날은 이슬람의 성월(聖月) 라마단(Ramadan)이 한창이었다.

이것은 종교전쟁이 아니지만 묘하게도, 이 전쟁은 인류의 세 종교적 달력이 교차하는 시간 위에 펼쳐져 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선명한 우연이다.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 세 종교는 모두 한 뿌리에서 뻗은 가지들이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조상, 각각 다른 이름으로 같은 존재를 향한 한 분의 신(God, Allah, Yahweh), 그리고 예루살렘이라는 하나의 성지를 공유한다. 말하자면, 형제들의 싸움이다. 카인과 아벨처럼, 이삭과 이스마엘처럼. 성경과 꾸란 모두가 증언하는 그 오래된 형제 갈등의 서사가, 핵시설과 탄도미사일과 드론의 언어로 다시 쓰이고 있는 거다.
그리고 이제 4월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Passover)을 맞는다. 이집트의 노예살이로부터 탈출한 기적을 기념하는 축제, 억압에서 자유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해방의 기억.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Easter)을 맞는다. 십자가의 죽음을 딛고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 인류를 대신해 흘린 피와 다시 열린 생명의 이야기. 라마단은 금식과 기도로 영혼을 정화하는 자기 비움의 시간이다.
세 절기 모두, 그 핵심에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 ‘죽음을 통과하여 삶으로’. 그 가르침이 살아 숨쉬는 바로 이 계절에, 같은 신의 세 자녀들이 서로를 향해 미사일을 겨누고 있다.
지금 중동의 하늘 아래에서, 전쟁이 시작된 이후 이란에서만 이미 1,9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고, 그 중에는 8개월 된 아기와 88세 노인이 함께 있었다. 그 숫자 뒤에는 이름이 있고, 이름 뒤에는 저녁 식탁이 있었고, 그 식탁 위엔 라마단의 기도가 있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그러나 4월은 본래 재생의 달이기도 했다. 이 전쟁이 지금 이 계절과 맞닥뜨린 것이 단순한 달력의 우연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한 뿌리에서 자란
세 가지들이, 같은 신의 이름으로 서로를 향해 미사일을 겨누는 것을 그 신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하지만 죽은 땅에서도 라일락은 핀다.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엘리엇은 그것을 잔인하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것이 유일한 희망의 증거가 아닐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