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이 지방 순찰 길에 죽자 환관 조고(趙高)와 승상 이사(李斯)가 유서를 조작하고 다루기 만만한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황위에 앉혀 진나라는 조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되면서 극도로 혼란에 빠지고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가뜩이나 시황제의 급진적인 개혁과 법가를 기반으로 한 폭압적인 통치와 만리장성 등의 건설은 국가 재정에 무리를 끼쳤고 민심은 피폐해진 상태였다.
그 무렵 진승(陳勝)이란 자가 900여 명의 인부들과 함께 만리장성의 건설에 동원되어 공사장으로 향하던 중 큰 비가 내려 모두 고립되고 만다.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 확실해지면서 당시 혹독한 진나라 법에 따라 받을 형벌로 목이 날아가게 된 처지에 놓일 것이 두렵게 되자 평소 야심있던 진승은 동료 오광과 함께 반란을 결심하고 봉기했다. 스스로 ‘초나라를 부흥시킨다’라는 의미로 국호를 ‘장초'(長楚)라 짓고 왕위에 올랐으나 결국 관군에 패배하고 죽는다.
허나 이 ‘진승-오광의 난’으로 진나라는 몰락하게 되고 각처에서 봉기된 세력 중 항우와 유방의 초한전쟁에서 유방(劉邦)이 승리해 진나라는 멸망하고 한(漢)나라 건국으로 이어졌다.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도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본디 소작농으로 미천해 배움이 없었으나 가슴에 품은 뜻이 크고 출세 야망을 숨기지 않았던 진승이 봉기할 때 외친 소리가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 즉,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였다.
이 말은 고려말 이성계 무리가 역성혁명을 시도할때도 나온 말이다. 말하자면 조선 건국의 슬로건이었던 셈이다.
최근 한국의 교육부 사무관이 ‘내 아이는 왕의 DNA’ 운운하며 초등생 아들의 담임 선생에게 갑질한 사실이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게다가 자신의 자녀 담임을 아동학대로 신고해 수차례의 민원 끝에 직위해제 처분도 받게 했다. 이어 후임 담임 선생에게도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이니 왕자에게 하듯이 듣기 좋게 말하라’ ‘또래와 갈등이 생겼을 때 철저히 편들어 달라’ 등의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예로부터 ‘남의 자식 고운 데 없고 내 자식 미운 데 없다’고 했다. 부모 눈에 제 자식은 다 ‘공주님’이고 ‘왕자님’인 것이다. 해서 자녀가 학교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길 바라는 부모의 심정은 인지상정일터.
그럼에도 왕조 시대도 아닌 21세기의 교육 공무원의 ‘왕의 DNA’ 발언은 황당하고 헛웃음만 난다.
정작 조선시대의 왕도(王道), 왕세자의 교육은 어떠했을까? 조선의 왕세자 교육 시스템은 매우 혹독했다. 때로 특별 대우가 있을지라도 ‘교육’ 자체의 의미를 훼손하는 특별 대우는 요구되지 않았다. 조선의 왕자들은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고 밤 11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에 네 번, 아침 학습, 조강(朝講)과 정오 학습, 주강(晝講) 그리고 저녁 학습, 석강(夕講) 및 야간 학습, 야대(夜對)의 공부 시간을 가졌다. 그렇다고 책에 의한 지식 교육에만 국한되지 않고 부모와 웃어른에 대한 예절을 통한 올바른 인성 교육도 받았다.
다시 말해 조선의 ‘왕의 DNA’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시스템을 통해 길러내는 것이었으며 더욱이 스승에게는 겸손했다. 한마디로 조선 왕세자들의 교육은 ‘수기치인(修己治人), 내 자신을 수양하고 세상을 다스린다’였다.
이는 왕정 시대의 권력임에도 막중한 책임감과 사회적 책무가 따른다는 것을 배우게 하는 엄한 교육이었던 거다. 해서 셰익스피어 조차 ‘헨리 4세’에서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고 했던 게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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