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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천 타임스케치] 중국인들의 ‘서울병’, 파리 신드롬과 달라

충격 아닌 그리움, 미디어가 빚은 환상이 현실적 애착으로 변할 때

2025년 0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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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천 칼럼니스트

중년의 미국인 폴은 아내의 자살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던 중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프랑스 여성 잔느와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단지 본능만을 전제로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잔느는 점점 현실과의 괴리를 느끼게 되면서 관계를 끝내려 한다. 그러자 폴은 익명 뒤에 벗어나 진심을 털어놓으며 사랑을 고백하지만 잔느는 거부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마지막에 폴은 잔느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충격과 공포 속에서 그를 총으로 쏘고 막을 내리게 된다. 1972년 출시되었던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다.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감정 없이 오직 본능에만 충실한 두 남녀의 파괴적인 관계를 통해 인간의 공허함과 고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낭만적인 파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비극적인 스토리는 관객들에게 파리의 관능과 예술이 공존하는 환상의 공간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세느강변의 우아한 건물들이라든가 석양에 물든 몽마르트르 속에서 펼쳐지는 격정적 사랑 등이 그것이다. 이 때문에 이른바 ‘파리 신드롬’이 세계적으로 퍼졌다.

헌데 이런 특정 도시에 대한 환상과 열기는 파리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도시가 동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19세기 영국 귀족들의 ‘이탈리아 증후군’이나 20세기 초 미국인들의 ‘런던병’ 등 처럼 이상향으로 여겨진 도시의 현실에 충격받는 일은 반복되어 왔다.

하지만 일본의 ‘파리 신드롬’은 무척 달랐다. 당시 경제 성장기를 맞은 일본 사회에서 이런 파리의 이미지는 억압된 감정의 해방구로 여겨졌고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환상을 품고 파리 동경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봄날 햇살 아래 우아한 카페에서 철학 담론을 나누는 지성인들의 도시, 샤넬 수트를 입은 여성들이 세느강변을 산책하는 로맨틱한 공간으로 각인된 파리…

청계천. 2025.09.05. (사진=서울시설공단 제공)

그러나 실제로 가서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소매치기, 불친절, 쓰레기로 가득한 파리의 모습은 ‘친절’을 중시하는 일본 문화와 충돌했고 이는 단순한 실망감을 넘어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수준의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관광객들이 늘어났다. 일부는 불안, 환각, 망상 등의 증상을 겪게 되자 프랑스 주재 일본대사관은 이들을 위해 긴급 의료 지원까지 제공해야 할 정도였다.
이렇듯 파리 신드롬의 실체가 알려지자 일본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이 파리 신드롬은 미디어가 만든 환상이 현실과 충돌했을 때 발생하는 심리적 재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최근에 중국인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서울병(首尔病, Seoul Syndrome)’이 화제다. 일본의 파리 신드롬과 유사한 듯 보이지만 큰 차이를 보인다. 서울을 방문한 중국인들이 그 매력에 빠져 귀국 후에도 지속적으로 서울을 그리워하며 재방문을 갈망하는 현상이다.

이는 한국 드라마와 K-팝을 통해 접한 세련되고 훌륭한 서울의 이미지에 대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헌데 이들은 파리 신드롬과 같은 ‘충격과 실망’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의 패션, 뷰티,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동경과 모방’에 더 가깝다는 진단이다. 지리적으로도 2-3시간 거리에 근접해, 환상보다는 현실적 애착이 형성되고, 아시아 문화권이라는 공통분모로 극심한 문화충격 대신 친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서울병’은 단순히 현실과 환상의 괴리에서 오는 심리적 충격을 넘어, 현실을 바꾸려는 적극적인 시도로 확장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비극적 결말을 통해 사랑의 환상을 깨뜨렸듯, 파리 신드롬이 낭만의 환상을 드러냈다면 서울병은 새로운 형태의 동경을 보여주며 도시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깊은 사유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다시말해 그 열망이 미디어가 만든 환상에 기반하면 파리 신드롬 같은 충격이 되고, 현실적 이해와 경험에 기반하면 서울병 같은 아름다운 그리움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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