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거리에는 여성들의 함성이 가득했다. ‘빵을 달라! 외치며 베르사유 궁전으로 행진하고 혁명 광장에서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는 소리였다.
드디어 혁명 후 ‘인권선언’이 선포되었지만 남성만을 위한 것이었다. 이에 올랭프 드 구즈가 ‘여성권리 선언’을 발표하자 혁명 정부는 그녀를 단두대로 보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된 지 불과 며칠 후였다. 단두대 위에 선 그녀는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 단상에도 오를 권리도 당연히 있다’는 유명한 마지막 말을 남겼다.
프랑스 여성들은 그 후 100여년을 더 싸워야 했다. 1848년 보통선거권이 주어졌지만 남성에게만이었을 뿐 여성들은 또 배제되었다. 다시 100년이 지나 1946년, 제2차 세계대전 후에야 그들은 투표권을 얻었다.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 프랑스에서 여성이 시민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1872년 미국의 수잔 B. 앤서니는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자 거부하며 말했다. ‘심판받아야 할 것은 나의 투표가 아니라, 시민의 투표를 범죄로 만드는 이 나라다.’ 48년 후인 1920년, 미국 여성들은 투표권을 얻었다. 1893년 뉴질랜드에서는 성인 여성 인구의 4분의 1이 서명한 ‘여성 투표권 청원서’가 2표차로 간신히 상원을 통과해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나라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1913년 한 여성의 죽음(에밀리 데이비슨) 15년 후, 여성들도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얻게 됐다. 이같은 사례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다. 그리고 이 모든 승리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단번에 오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1979년 이란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팔레비 독재 왕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수천 명의 여성들이 거리로 나섰다. 당시 이란 최초의 여성 판사였던 에바디도 혁명에 동참했다. 그들은 자유로운 이란을 꿈꿨다. 혁명이 성공했지만 돌아온 것은 쓰디쓴 배신이었다. 새 정권은 에바디의 법복을 벗겼으며 히잡은 강제되었다. 독재에 저항하며 히잡을 썼던 여성들은 이제 히잡을 강요하는 또 다른 독재와 싸워야 했다. 2022년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아미니가 의문사한 후 ‘여성, 생명, 자유’라는 구호가 이란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지난 11일, 한 이란 여성이 하메네이의 사진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사진이 보도됐다. 그 행위는 세 가지 금기를 동시에 깬 것이었다. 히잡을 벗었고, 최고지도자를 모독했으며, 여성으로서 담배를 피운 것이다.
그녀가 하메네이의 사진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 것은 충동적 행동이 아니라 수십 년간의 억압, 수천 명의 희생, 수백만 명의 분노가 응축된 상징이었덤 셈이다. 이 여성 역시 긴 고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7세 때 체포되었고, 히잡 반대 프로그램에 출연한 후 협박을 받은 바 있으며, 라이시 대통령 사망 관련 글로 체포되어 학대를 당한 후 망명했다. 역사는 잔인한 패턴을 반복하곤 한다.
혁명은 여성의 손으로 이뤄지지만, 승리의 과실은 남성이 독차지하고 여성들은 혁명의 주역에서 순식간에 침묵해야 할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다. 허나 이보다 여성들에게 더 고통스러운 것은 배신이었다. 목숨을 건 혁명이 승리하면 그들은 버려졌을 뿐만 아니라 더욱 억압되었다.
이것이 여성 저항이 마주한 가장 깊은 고뇌다. 그들은 체제와 싸우는 동시에 동지로 여겼던 이들의 배신과도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란의 ‘담배 여성’의 행동은 하메네이의 사진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 그 순간, 그용기는 에밀리 데이비슨, 수잔 B. 앤서니, 올랭프 드 구즈와 이어진 것으로, 단지 한 여성의 저항이 아니라 237년간 이어진 여성들의 외침이며 앞으로 올 100년을 향한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역사는 가르친다. 언젠가는 승리한다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