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중이던 네덜란드 상선 ‘에라스무스 호’가 난파되어 일본의 한 항구로 떠밀려 왔다. 1600년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가 막을 내릴 무렵, 조선과 명나라 정벌에 실패한 후 쇼군의 자리를 놓고 대립하던 때, 유럽 예수회와 스페인, 포르투갈이 일본에서의 가톨릭 선교권과 무역 독점권을 가지고 다투고 있는 형국이었다.
에라스무스 호의 항해사는 영국인 블랙손이었는데 통역관으로 그에게 예수회 신부가 지정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종교적으로 적대국인 영국인 블랙손과 네덜란드인 선원들에 대한 반감으로 통역도 대충 해줄 뿐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협조하지 않았다.
헌데 블랙손이 군사적, 외교적으로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그 지역 제후 토라나가는 그에게 가톨릭 신자이자 포르투갈어에 능한 유부녀 마리코에게 통역을 맡긴다. 자연 두 사람은 위험한 사랑에 빠지는 한편 블랙손은 토라나가를 따라 일본 전국시대의 여러 전투와 정치적 암투 현장을 돌아다니며 보고 느낀다.
드라마는 당시 일본문화와 생활상 등에 대해 잘 묘사해 주고 있었는데 한 예로 표류해온 블랙손에게 커다란 둥근 나무통(お風呂:おふろ)에 더운 물을 뎁혀주고 들어가 목욕하라고 하자 삶아 죽이는 것으로 오해하고 질색하는 장면도 나온다.
아무튼 결국 에라스무스 호가 불타 없어져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블랙손은 절망한다. 라이벌인 예수회 신부가 방화했을 거라 짐작했지만 실은 토라나가의 짓이었다. 이용가치 있는 블랙손을 영원히 자기 곁에 두고 가신(家臣)으로 만들기 위한 심산이었던 것이었다.
결국 블랙손은 수군을 창설하자는 토라나가의 제안을 거부하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에라스무스 호를 재건해 고향 영국으로 돌아간다. 실제 영국인으로 일본에서 무사계급을 받은 윌리엄 애덤스의 이야기를 토대로 1980년에 만들어졌던 영어로 된 미국 드라마 ‘쇼군’이다.
헌데 올해 ‘쇼군’이 리메이크되어 새로 나왔다. 여러 면에서 다르게 각색되었지만 제작진과 스태프가 미국인들인 반면 출연진은 모두 일본인들이었고 70% 이상이 일본어 대사로 되었다. 예전의 ‘쇼군’에 비해 오리엔탈리즘이 많이 희석됐고 역사 고증에 더 충실했다는 평이 나오더니 지난 15일 에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남녀주연상 등 18개 부분의 상을 휩쓸었다.
그러자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이번 일본어 드라마가 미국에서 흥행한 것은 ‘오징어 게임’ 같은 한국 드라마의 약진이 토양을 만든 덕이 크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외국 영화와 드라마를 더빙으로 보는 것을 선호하지만 한국 드라마 성공을 계기로 해서 영어 자막으로 보는 데에 대한 반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2020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은 인상적인 소감을 남긴 바있다. ‘자막의 장벽, 1인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자막을 싫어하는 미국 관객과 할리우드의 ‘영어 중심주의’를 향한 날카로운 일갈이었다.
오늘날 한류가 세계 중심에 서기까지에는 당사자들의 각고의 노력과 재능은 물론이지만 그 이면에는 유명함과는 별개로 미래를 향해 묵묵히 신념을 가지고 걸어온 국내외 많은 이들의 시간과 땀이 켭켭이 쌓이고 쌓인 오랜 세월의 밑거름이 토양을 일궈냈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같은 문화권 나라 테두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60여년 전 극동아시아 콘텐츠의 우수함을 알린 ‘쇼군’의 인기가 있었기에 ‘오징어 게임’이 신화를 낳을 수 있었고 다시 그 성공신화의 후광에 힘입어 올해 ‘쇼군’이 18관왕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그 어떤 것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고 모든 일은 씨줄과 날줄로 엮어져 있기 때문이어서다. 마치 이 땅에서도 오래 전부터 인종과 성차별 그리고 억압을 견뎌온 이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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