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간 기업결합을 조건부로 승인했다. 두 회사가 보유한 국내외 노선 중 중복노선에 대해 슬롯(비행기 이착륙 횟수)과 운수권 일부를 반납해야 하는 구조적 조치를 부과했다.
공정위는 22일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 지분 63.88%를 취득하는 기업결합에 대해 조건부 승인하기로 밝혔다. 공정위는 심사 결과 국제선의 경우 양사 중복노선 총 65개 중 미주와 유럽, 중국 등 26개 노선, 국내선은 중복노선 총 22개 중 14개 노선에서 경쟁을 제한할 우려가 크다고 판단했다. 해당 노선에 대해선 경쟁사의 신규 진입을 촉진하기 위해 향후 10년간 슬롯·운수권 이전 등 구조적 조치를 부과하기로 했다.
공정위 측은 “통합 항공사를 견제할 마땅한 경쟁사가 없다는 점, 양사 통합으로 인해 서로 가장 강력한 경쟁사가 사라져 운임 인상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을 이유로 시정 조치를 시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먼저 국내 공항 슬롯의 경우 신규 항공사가 진입하거나 경쟁 항공사들이 증편할 경우 대한항공과 아시아나가 보유한 슬롯 반납을 의무화했다. 대상은 국제선 26개 노선, 국내선 8개 노선이다.
경쟁이 제한된다고 본 26개 국제선 노선은 미주(5개)·유럽(6개)·중국(5개)·일본(1개)·동남아(6개)·기타(3개) 등이다. 뉴욕·LA·파리·로마·베이징·칭다오·시드니·푸켓 등 국내 항공 이용자가 선호하는 알짜노선 대부분이 포함됐다. 공정위는 양사를 합쳐서 노선 점유율이 50%가 넘으면 경쟁제한성이 있다고 봤다. LA·뉴욕·바르셀로나 등은 점유율이 100%다.
운수권도 새로운 항공사가 들어올 경우 반납해야 한다. 대상은 유럽 프랑크푸르트, 런던, 파리, 로마, 이스탄불과 중국 장자제, 시안, 선전, 베이징 그리고 시드니, 자카르타 등 총 11개 노선이다.
이들 항공사가 반납해야 할 운수권 개수의 상한선은 슬롯의 반납 개수 산정 기준과 동일하다. 다만 미배분된 운수권이 존재할 경우, 반납해야 할 운수권 개수에서 이를 차감한다. 슬롯이나 운수권 반납 관련 구체적인 내용은 신규 항공사가 진입 신청 시점에 공정위와 국토교통부가 협의해 정한다는 방침이다.
공정위는 슬롯과 운수권을 제한하는 구조적 조치가 이행되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해 조치대상 각각의 노선에 대해 좌석공급 축소 금지조치와 운임인상 제한 등의 행태적 조치를 병행 부과했다.
항공 마일리지도 2019년 기준 제도보다 소비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지 못 하도록 했다. 양 사가 합병하면 마일리지 통합 방안도 공정위가 추가 심사한다.
이는 공정위가 지난해 12월 밝힌 잠정 결론과 큰 차이는 없지만 대한항공 요구를 일부 반영한 것으로 전해진다. 먼저 대한항공은 구조적 조치 중 해외공항 슬롯 이전과 관련해 일부 문구를 명확히 해달라고 요구했고, 공정위는 최종적으로 ‘예외사유’를 추가했다. 대한항공은 해외공항을 허브로 가진 외항사의 경우 이미 그 곳에서 압도적인 슬롯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슬롯 이전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해외공항의 슬롯 또한 항공사의 중요 무형자산이기 때문에 가치를 고려않고 이전할 경우 큰 손실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뉴욕, 런던, 프랑크푸르트, 파리, 시드니 등 해외 주요 공항에서의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슬롯 점유율은 적게는 0.2%, 많게는 0.5%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이에 공정위는 최종적으로 신규 진입 항공사가 ▲외국 공항 슬롯을 이전·매각 ▲운임결합 협약 등을 체결 ▲국내 공항 각종 시설 이용 협력 ▲영공통과 이용권 획득을 위한 협조 등을 요구시 정당한 사유 없이 거절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조항을 달았다.
행태적 조치도 수정 조치됐다. 공정위는 당초 ‘노선별 공급 좌석수를 2019년 공급좌석수 미만으로 축소 금지한다’는 조항을 달았다. 대한항공 요청에 따라 ‘2019년 공급좌석수 대비 일정비율 미만’이라고 일부 문구를 수정했다.
‘운임인상 제한’ 조치의 경우, 공정위는 분기별 각 클래스별 평균운임을 2019년 대비 소비자 물가지수 상승률 이내로 관리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코로나19 사태로 수요와 공급 모두 현저히 감소한 상황인 만큼, 2019년 운임을 현 상황에 적용할 경우 시장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공정위는 시정조치는 유지하되, ‘2019년 기준 수요가 회복되지 않을 경우 의무 내용을 조정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서비스도 ‘2019년 기준 대비 불리하게 변경 금지’에 더해 ‘상품·서비스 변경이 불가피하거나, 전체적인 품질 저하를 초래하지 않는 상품·서비스 내용의 조정은 불리하게 변경하는 행위로 보지 않는다’는 예외 조항을 추가했다.
대한항공 입장에서는 이 같은 공정위의 결정이 다소 불리한 상황이지만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대한항공 측은 “이번 공정위의 결정을 수용하며, 향후 해외지역 경쟁당국의 기업결합심사 승인을 위해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새로운 시장 진입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경쟁환경을 만든다는 의미로 공정위의 운수권 및 슬롯 관련 시정조치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각 시정조치 대상 노선의 경쟁제한성을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통합으로 경쟁사가 줄어들 경우 기본적으로 경쟁제한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시장점유율 밖에 없는 상황임을 감안한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공정위의 결정이 합병 시너지 창출 효과가 반감되면서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통합항공사가 촘촘한 네트워크를 토대로 시너지를 창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너지 효과가 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