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남’은 느슨해진 한국 넷플릭스 콘텐츠에 긴장감을 준다. 그간 ‘K-콘텐츠’라는 그럴싸한 단어로 포장해 조악한 결과물을 양산하던 넷플릭스는 지난해 11월 연상호 감독의 ‘지옥’ 이후 실로 오랜만에 바로 그 K-콘텐츠라는 말에 어울릴 만한 드라마를 내놨다.
이 성과의 가장 큰 지분은 배우들에게 있다. 하정우·황정민·박해수·조우진·유연석·현봉식 등은 영화·드라마 예술의 중심이 감독이나 작가가 아니라 배우일 수도 있다는 걸 주장하듯 연기한다. 이들의 연기는 마약·스파이·남미 등 국내 영화·드라마에선 아직 익숙치 않은 소재를 납득시킨다. 물론 이는 매 작품마다 배우들의 연기력을 끌어올릴 줄 아는 윤종빈 감독 특유의 연출력이기도 하다.
하정우-윤종빈 콤비에겐 실패가 없다. 윤 감독의 데뷔작인 ‘용서받지 못한 자'(2005)를 포함해 그의 전작 5편 중 4편을 함께한 하정우는 윤 감독의 6번째 작품인 ‘수리남’에서 최근 수 년 간 그가 보여준 연기 중 가장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하정우는 이번에도 소위 하정우식 연기를 하는데, ‘수리남’에선 그 연기가 이상할 정도로 신선하게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윤 감독 특유의 대사가 하정우의 연기와 유독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거꾸로 윤 감독이 하정우 덕을 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윤 감독이 하정우 없이 만든 ‘공작'(2018)은 완성도는 높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었다. 하정우가 컴백한 윤 감독의 신작은 6시간 내내 전작에 없던 생기로 가득차있다. 윤 감독의 각본을 가장 잘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 역시 하정우로 보인다.
황정민은 마약왕 ‘전요환’을 마치 ‘신세계’의 정청, ‘아수라’의 박성배, ‘곡성’의 일광,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을 섞어놓은 듯이 연기한다.
황정민은 처음 함께 연기한 하정우와도 절묘하게 호흡한다. 두 배우가 같은 장면에 있을 때 ‘수리남’의 에너지는 가장 커지고 긴장감은 올라간다. 박해수는 국정원 요원 ‘최창호’와 검은 돈을 노리는 사업가 ‘구상만’이라는 판이한 두 캐릭터를 오가는 능숙함을 보여준다. 그가 왜 최근 가장 주목받는 배우인지 ‘수리남’의 몇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조우진과 유연석은 이전에 한 적 없는 연기를 하는데도 어떤 어색함도 없다. 분명 ‘수리남’은 연기 괴물들의 활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드라마다.
그렇다고 ‘수리남’을 연기 외엔 볼 게 없는 그저 그런 드라마로 여기면 곤란하다. 배우들이 자기 몫을 해낸 것처럼 윤 감독 역시 전작에서 보여준 장기들을 놓치지 않고 이 작품에 담아내며 영화 뿐만 아니라 드라마도 잘 만들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그는 매회 각기 다른 에피소드를 풀어내며 텐션을 능숙하게 조절할 줄 안다. 개성 있는 캐릭터를 이합집산시키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역시 여전하다. 대사는 귀에 착착 달라붙고, 남미의 풍광과 수리남이라는 독특한 나라를 디테일하게 담아낸 촬영 역시 인상적이다. 여기에 한국인에게만 있는 특유의 페이소스를 담아내는 감성은 ‘수리남’이 틀림없이 윤종빈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수리남’은 윤 감독의 전작을 망라한다.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공작’과 유사한 방식으로 출발해 ‘비스티 보이즈’를 거쳐 ‘범죄와의 전쟁’에 들렀다가 다시 ‘공작’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비정함이 있고 ‘군도’의 열기도 있다.
강인구는 최익현(범죄와의 전쟁)처럼 행동하다가 박석영(공작)과 유사한 처지로 내몰리며, 살아남기 위해 마치 재현(비스티 보이즈)처럼 움직인다. 전요환은 조윤(군도)처럼 악랄하고 최형배(범죄와의 전쟁)처럼 묵직하며 리명운(공작)처럼 주도면밀하다. 요컨대 ‘수리남’은 윤 감독이 15년 넘게 쌓아온 필모그래피를 6부작 드라마를 통해 집대성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수리남’은 윤 감독이 다시 한 번 선보이는 스파이 영화라는 점에서 ‘공작’과 같은 선상에 놓고 봐야 한다(‘공작’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박석영이 “하여튼 조선 것들은”이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한 대사가 ‘수리남’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전요환의 입을 통해 반복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공작’은 진심으로 공익(公益)을 위해 움직인 한 인간을 통해 공익을 위한다면서 결국 사익(私益)을 챙긴 이들을 에둘러 비판한다면, ‘수리남’은 반대로 철저히 사익을 추구하지만 이 과정에서 공익을 달성하는 사람과 공익이라는 완장을 차고 사익을 짓밟는 이들을 함께 보여준다. 아마도 윤 감독에게 언더커버는 이 세계의 논리 혹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희미한 정의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소재였는지도 모른다.
강인구는 박석영을 소환하면서 동시에 최익현을 호출한다. 그러니까 ‘수리남’은 ‘공작’과 ‘범죄와의 전쟁’을 배합해 만든 작품 같다. 최익현이 집안과 식구, 가족과 가장 그리고 아버지의 책임을 주창하며 손을 더럽히는 것처럼 강인구 역시 이 모든 게 가정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범죄에 개입한다. 최익현이 깡패인 것도 아니고 깡패가 아닌 것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것처럼, 강인구 역시 민간인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민간인이 아닌 것도 아닌 불투명한 존재로 남아 돈을 벌기 위해 발버둥친다. 강인구 역시 최익현처럼(혹은 박석영처럼) 정체불명으로 살아감으로써 윤 감독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캐릭터가 된다.
‘수리남’은 분명 완성도 있는 드라마이지만, 어떤 시청자에게는 동어반복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윤 감독이 그간 영화를 통해 해왔던 얘기들을 신작에서 또 한 번 반복한다고 지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윤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시청자라면 ‘수리남’에서 전작의 기시감을 느낄 만한 대목이 종종 나온다.
다만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다. 같은 이야기를 다시 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감독은 필모그래피 전체를 하나의 주제로만 채워나가기도 하지 않나. ‘수리남’에서 진짜 아쉬운 건 윤 감독 작품 세계에 관한 게 아니라 경쾌하면서도 강렬한 전반부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힘이 달려 보이는 후반부다. 그렇다면 기존에 8부작이었던 ‘수리남’이 6부작으로 축소된 건 오히려 좋은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