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나온 ’10일 안에 남친에게 차이는 법(How to lose a guy in 10 days)’란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날 하루, 자식들이 모두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되자 아버지는 옷을 몽땅 벗어 던지고는 벌거숭이가 된 채로 집안을 신나게 돌아다니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렇게 편한 걸…’
어쩌면 우리들 중에도 이처럼 모든 걸 벗어 던지고 그대로 쉬고 싶을 때가 종종 있을 거다. 체면, 형식 없이 편안함 그리고 안락함을 만끽하면서. 사람들은 물론 식구들과도 거리를 두고 텅빈 집에서 혼자서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얼마전까지만 해도 많은 이들이 혼자 생활을 즐기는 경향이 늘어나면서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는 등의 말들이 점차 낯설지 않게 들리는가 했는데 어느새 ‘혼족’을 넘어 ‘홈혼족’이라는 새로운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일명 홈 루덴스(Home Ludens)다.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빗대 ‘집에서 혼자 논다’는 말이다. 이것 저것 신경 안 쓰고 남의 눈치 안보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집에서 가장 편안한 옷차림으로 누리는 즐거움을 갈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바쁘게 질주하던 생활패턴에서 조금은 늦추어가는 삶으로의 전환에서 오는 여유로움으로 나를 찾자는 의미일 게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쌍소도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재촉하지 않으며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실제로 몇 년 전 한 설문조사에서는 ‘여가시간에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답이 7할 가까이나 나왔다. ‘집이 제일 편하고 많은 것을 할 수 있어서’라는 거다. 헌데 여기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사회활동의 제약을 받게되고 이 때문에 자연 집에서의 생활이 강요되다시피 하다보니 뉴노멀에 적응하게 되면서 자의반 타의반 홈 루덴스에 동참한 셈이 되었다.
허니 이왕 이렇게 된거 텅 빈 집에서 혼자 가장 편안한 옷을 걸치고 (벌거벗어도 좋겠지), 가벼운 간식 그리고 약간의 술과 함께 부담 없는 영화나 음악을 감상한다면 ‘그야말로 말을 해 무엇하랴!’ 가 아닐는지.
하지만 가만히 보면 이는 갑자기 생긴 새로운 문화가 아니다. 덴마크의 ‘휘게(Hygge)’라는 문화나 핀란드의 ‘칼사리캔니(Kalsarikanni)’가 바로 그것들이다. ‘휘게’는 편안함, 아늑함, 안락함을 뜻한다.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 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한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뜻하는 것이니 우리말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고나 할까?
다시 말해 눈이나 비가 내리는 창 밖을 보며 방 안에서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는 것, 그게 바로 휘게다. ‘칼사리캔니’는 흔히 ‘팬츠드렁크’라고도 하는데 텅 빈 집에서 편안한 옷차림과 자세로 혼술을 즐기며 소일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런 문화가 어디 서양에만 있을라고? 우리에게도 이런 문화는 이미 오래 전에 있었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여가를 탐닉하는 탁족(濯足)이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상투를 풀어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바지를 내린 뒤 바람에 몸을 맡기며 쉬는 이른바 풍즐거풍 (風櫛擧風) 풍습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음력 9월9일 중양절(重陽節)은 산에 올라 국화주나 국화차를 마시며 이를 즐기는 중요한 명절이기도 했다.
헌데 아무튼 덴마크를 대표하는 단어는 이제 ‘휘게’가 아닌 새 단어가 새로운 가치로 떠올랐다. ‘삼푼신드(samfundssind)’다. 덴마크가 ‘디지털 백신여권’ 제시 해제를 끝으로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내렸던 봉쇄 조치를 모두 거둬들임으로써 유럽연합(EU) 국가 최초로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시대에 진입하게 된 거다. 봉쇄 조치가 발효된 지 548일 만에 2020년 3월 팬데믹 이전 일상을 되찾게 된 거다. ‘삼푼신드’는 사회 또는 공동체라는 의미의 ‘삼푼드(samfund)’와 마음이라는 뜻을 지닌 신드(sind)의 합성어다.
인구 580여만 명인 덴마크는 지난해 3월 유럽에서 처음으로 봉쇄령을 내리고 강력한 규제를 취해 우수 방역국으로 꼽혔지만 겨울이 되면서 2차 유행으로 확진자 수가 급증하더니 한 달 만에 하루 확진자가 4500여 명을 넘어서면서 지난 1월 중순까지 4 자리 숫자가 이어졌다.
그랬던 덴마크가 8개월 만에 일상 생활 회복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정부와 국민들의 한마음 때문이라고 한다. 정부가 내놓은 백신 접종과 검사를 조건으로 한 코로나 패스 도입 그리고 이에 따른 점진적인 방역 규제 완화에 국민들과 기업들이 이에 적극참여하고, 감염 취약 계층을 위해 자원을 기부하는 등 사회적 공동체 의식을 보여준 덕분이었다는 분석이다. 이 때문에 덴마크인들이 보여준 ‘공동체 의식’을 뜻하는 ‘삼푼신드’가 2020년 ‘올해의 단어’로도 선정된 거다.
다시말해 나 혼자 혹은 내가 아는 사람들과 같이하는 것이 ‘휘게’라면 ‘삼푼신드’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행동을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덴마크가 백신 접종에 속도를 낼 수 있었던 비결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강한 신뢰였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또 다른 한편의 선진국들에서는 부스터 샷(booster shot)으로 논란 중이다. ‘구명조끼를 여러 벌 챙기는 동안 백신 빈국(貧國)은 익사하고 있다’는 선진국들의 백신 독식에 대한 도덕적 비난에 더해 부스터샷의 효과에 대한 과학적 논쟁으로 옥신각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일까? 흔히들 사람들은 ‘바이러스가 인간보다 똑똑하다’고 자조적으로 표현한다. 항상 인간보다 앞서 예상을 넘는 변종의 무차별적 공격때문이다. 하지만 인류는 언제나 이를 극복해 왔다.
지난해 초 느닷없는 코로나 19 공습에 전 세계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년말 가까이 되서 백신이라는 무기를 찾아내 코로나에 전쟁을 선포하고 반격을 가해 오고 있다. 하지만 아무 대비도 없던 당시 상황에서 나라 전체에 이동 제한령이 떨어지자 이탈리아 사람들은 집집마다 발코니로 나왔다. 남녀노소 불구하고 누군가는 노래하고, 누군가는 북을 두드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프라이팬이나 냄비 뚜껑을 들고 나와 장단도 맞췄다.
그런가 하면 기타나 아코디언 같은 악기도 등장하고 유명한 가수, 연주자, 지방 정부까지도 동참하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발코니 합창’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헌데 여러 노래 중에서도1990년대 노래 ‘그라치에 로마(고맙다 로마)’가 인기였는데 이는 ‘비록 우리가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다’는 가사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떨어져서 함께 (Unitimalontani)’라는 해시태그가 불꽃처럼 번져나갔다.
한때는 외출 없이 집에만 머무는 이들을 두고 방콕족이니 나홀로족이니 하며 경시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만의 여가시간이 존중 받는 ‘Indoor Life’의 시대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코비드와 함께 살아가야하는 어려운 시기를 만난 오늘의 우리에게 ‘혼자이지만 모두가 함께’라는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반드시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한 메시지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Unitimalonta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