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찌, 생로랑, 발렌시아가 등을 소유한 럭셔리 그룹 케어링의 CEO(최고경영자) 프랑수아-앙리 피노가 이달 초 프랑스 국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고객들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고, 나는 고객들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5일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유럽 명품 업계는 ‘명품 브랜드의 미국 생산’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했지만, 트럼프발 관세 정책은 이를 압박하고 있다. ‘메이드 인 유럽’의 근간을 흔들며 그것이 지닌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명품 브랜드는 장인이 손수 공들여 만든다는 것뿐 아니라 ‘유럽’에서 생산된다는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명품 브랜드들은 유럽의 오랜 역사와 문화, 장인정신, 고유한 기술 같은 전통이 세계적인 명품을 만드는 데 독보적이고 중요한 바탕이란 이미지를 내세워 왔다.
이는 수천 만원을 호가하는 비싼 가격표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됐다. ‘메이드 인 유럽’은 단순히 생산 기지를 뜻하는 게 아닌, 명품 그 자체를 상징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고강도 관세 부과 정책은 ‘메이드 인 유럽’의 가치를 뒤흔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유럽연합(EU)에서 수입되는 제품에 5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고, 협상 시한을 7월 9일까지 연기했다.
명품업계는 고마진 덕분에 관세 부담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지만, 만약 생산 기지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전하면 소비자들이 계속 명품을 선호하게 될지, ‘메이드 인 유럽’이 주는 명품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우려하고 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관세 정책을 발표하자, 중국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틱톡에는 수천만 원대 에르메스 버킨백 등 고가의 명품이 값싸게 위조되는 과정을 폭로하는 영상들이 잇달아 올라왔다.
유럽 명품을 지탱하는 마을, 스페인 우브리케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스페인의 작은 마을 우브리케는 글로벌 명품 공급망의 중심지다. 마을 인구 1만6000명 중 약 4분의 1이 가죽 제품 생산에 종사하고 있다.
가방 제조사들은 우브리케의 광범위한 공급망, 전문 기계 제작사, 무두질 공장, 물류 허브에 의존하는데, 이러한 전문 제조 인프라는 수십 년에 걸쳐 함께 발전해 왔다.
샤넬 가방은 간판도 없는 은밀한 작업장에서 만들어지고, 루이비통 가방은 도시 여러 곳에 있는 오래된 공급업체에 의존해 생산된다.
명품 브랜드들은 대개 한 명의 장인이 가죽 가방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땀 한 땀 정성껏 만드는 이미지를 홍보하지만, 실제로는 반복적이고 전문화된 작업으로 나눠 생산한다.
다만 고급 가죽 제품의 제조는 여전히 높은 숙련도를 요구하는 일련의 정밀한 수작업 과정을 포함한다. 검사와 재단, 얇게 만들기, 보강, 바느질, 조립 과정 등은 기계가 쉽게 따라하기 힘든 기술이다.
미국·중국으로 간 명품들, 다시 돌아온 이유
트럼프의 생산 이전 압박 전에도 유럽 외 지역으로 생산을 옮긴 명품 브랜드가 있었지만, 지속성은 낮았다.
루이비통은 지난 2019년 늘어나는 수요를 맞추고 제조를 다변화하기 위해 텍사스 알바라도에 제품 제조 작업장을 열었지만, 현지 장인 채용과 교육에 어려움을 겪으며 확장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루이비통을 보유한 글로벌 명품 그룹 LVMH의 CEO 베르나르 아르노는 공장 개장 초기 1000명을 고용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 이 시설에는 약 300명만 근무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르노는 최근 EU가 트럼프와의 관세 합의에 실패하면 “불가피하게 미국 내 생산을 늘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우브리케를 떠나 중국 등 저비용 국가로 생산을 옮겼지만, 브랜드들은 몇 년 후 다시 우브리케에 돌아왔다.
중국 공장들을 통해 디자인 사양이나 재료가 유출되면 시장엔 넘쳐나는 위조품이 생산돼 팔리는 등 중국은 위조품 생산에 취약했다.
우브리케 지역 고용주 협회에서 일하는 마르코스 오반도는 트럼프발 관세가 비용 부담을 늘리더라도 명품 브랜드들이 우브리케를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도시는 가격 경쟁력이 없으니 품질에 집중해야 한다”며 “포르투갈이나 동유럽 저비용 국가들과 경쟁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도시가 수십 년 동안 명품 브랜드와 함께해온 데는 이유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