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자락, 애너하임의 저녁 공기가 아직 식지 않은 시각에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빅에이 아래로 들어선다. 74승 60패의 필리스와 52승 82패의 에인절스. 순위표의 거리는 멀지만, 28일(금) 1회말의 마운드는 그 순서를 뒤집어 놓았다.
언제나처럼 애너하임 빅에이의 저녁은 6시 38분에 시작된다. 데트머의 손을 떠난 초구가 포수 미트에 꽂힌 시각도 예정된 6시 38분 그대로였다. 기온 89도, 습도 96퍼센트. 해가 기울었는데도 더위가 꺾이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습기까지 얹혀 몸에 옷이 달라붙는다. 이날은 잭 네토 버블헤드가 배포되는 날이었다. 붉은 상자를 하나씩 들고 들어선 3만 4951명이 그 공기 속에 앉았다. 시즌 막바지 승패에서 밀려난 팀의 홈경기 치고는 적지 않은 숫자였다. 경기의 출발은 그러했다.

그동안 데트머가 선발로 나선 날, 에인절스 타선은 좀처럼 시원하게 풀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1회말은 달랐다. 1번 네토가 볼넷을, 2번 트라웃과 3번 메클러가 연달아 안타를 때리며 선취점을 올렸다. 메클러의 안타는 초구를 노린 것이었다. “쉬는 시간이 좀 있었다. 일찍 스윙을 내서 내 감이 어디쯤인지 확인하고 싶었고, 제대로 맞히고 싶었다”고 그는 경기 후 말했다. “초구가 존 가운데로 들어왔다. 그래서 좋은 스윙을 했을 뿐이다.” 흔들리기 시작한 필리스의 선발 페인터는 폭투 두 개를 잇달아 범했고, 에인절스는 1회말에만 3점을 뽑아냈다.
리드 데트머는 시즌 27번째 선발 등판에서 6이닝 동안 안타 여덟 개를 맞고도 1실점으로 버텼다. 86구. 3:1 승리요건을 갖추고 호세 페르민에 마운드를 건넸다. 스즈키 감독은 “기록지만 보면 이상해 보이지만 오늘 데트머는 훌륭했다”며 “그런 팀을 상대로 6이닝 1실점이면 대단한 것이다. 우리를 이길 수 있는 자리에 세워놨다”고 했다. 데트머 본인의 평가는 담담했다. “몸 상태는 좋았다. 다만 오늘은 슬라이더가 제대로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래도 6회까지 끌고 갔고, 팀에 이길 기회를 준 것 같다.” 라고 했다.

9회, 여전히 3:1의 에인절스의 승리상황에서 마운드에는 벤 조이스가 섰다. 101마일이 나왔다. 쉽게 경기를 마무리 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공이 스트라이크존을 찾지 못했다. 볼넷 두 개로 주자가 쌓였고, 브라이슨 스탓의 배트에 98.3마일 포심이 걸려 우측 담장을 향했다. 2점차의 리드가 한 번에 지워질 궤적이었다. 메클러의 글러브가 먼저 그 자리에 도착했다. 3점 홈런을 훔쳤다.
메클러는 “타구에 계속 시선을 두고 있었다. 워닝트랙에서 내 위치가 어디쯤인지 몸으로 느껴졌고, 그래서 타이밍을 잡고 뛸 수 있었다.” 잡아낸 직후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순간에는 정말 신이 났다. 리드를 지켰고, 승리에 가까워졌으니까.” 마이크 트라웃이 옆에서 그를 진정시켰다고 한다. “마이크가 가끔 나를 가라앉혀준다. 좋은 순간이었다. 그대로 지켜서 이겼으면 더 좋았을 텐데.”
조이스는 그 아웃 뒤에 볼넷을 하나 더 주고 만루를 내어준 후, 마운드를 내려갔다. 조이스도 교체를 “이해한다. 내가 나를 그 상황에 몰아넣은 것이다. 누구도 탓할 수 없다. 그냥 좋지 않은 밤이었고, 감을 못 찾았을 뿐이다.” 라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벤치가 움직였다. 다음 타자는 좌타 브랜든 마시. 스즈키는 좌완 새미 페랄타를 올렸다. 필리스도 우타 에드문도 소사를 대타로 냈다. 소사의 배트는 만루 상황에서 딱 한 번 돌았고, 타구는 담장을 넘었다. 5-3. 두 이닝 전까지 2점 차 리드였던 경기가 한 타석에 뒤집혔다.
8회까지 앞서고도 패한 경기가 이날로 시즌 열한 번째. 최근 사흘 사이에 반복된 장면이기도 하다. “물론 좋지 않다. 하지만 이 선수들은 회복력이 있다”고 스즈키는 말했다. “클리블랜드에서 힘든 두 경기를 지고 나서도 오늘 다시 나와 이길 기회를 만들었다. 9회말에도 동점 주자를 타석에 세웠다. 이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정작 이날 주인공이었던 네토는 4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다만 1회말 3점의 출발은 그가 골라낸 볼넷이었다. 그리고 에인절스는, 잘 던진 선발과 잘 잡은 수비 하나를 손에 쥐고도 지는 밤을 또 하나 보탰다.
야구의 일부라고 메클러는 말했다. 다만 이 팀에게는 그 일부가 너무 자주 찾아온다.
<석승환 객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