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일촉즉발의 전운 속에 미국과 러시아 외교 수장이 담판을 지었다. 양측이 일단 대화를 이어 가기로 하면서, 목전으로 평가됐던 러시아의 무력 행위도 잠시 유예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21일 국무부와 각 외신 중계 등에 따르면,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이날 오전 11시 스위스 제네바에서 참모들을 동반하고 마주앉았다.
회담장에 나란히 들어선 두 사람은 미리 마련된 사진 촬영 장소까지 서로 안내하며 예의 있는 모습을 보였다. 현장에 미리 대기하던 한 외신 기자가 블링컨 장관에게 “건설적인 대화를 할 준비가 됐나”라고 물었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각각 두 개씩 나열된 국기 앞에 선 두 사람은 악수를 하고 미소를 지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사진 촬영은 순식간에 끝났다. 양측은 곧장 자국 좌석으로 향했고, 자신들 참모들과 짧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말문은 라브로프 장관이 먼저 열었다. 그는 통역을 통해 “제네바에서 회담을 열자는 제안에 매우 감사한다”라며 “당신이 전화를 걸어 우려를 명확히 하기 위해 만나자고 제안했을 때, 우리는 매우 좋은 생각이라고 믿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발언은 곧장 날 선 주제로 이어졌다. 라브로프 장관은 전날 국무부가 경고한 러시아의 정보 활동을 거론, “국무부가 준비한 ‘러시아의 오정보 주장’에 관한 방대한 양의 정보를 숙지하려 엄청난 시간을 쏟았다”라고 말했다.
전날 국무부는 러시아 정보 당국과 협력한 우크라이나 국적자 네 명을 제재하고, 홈페이지에 게재한 팩트 시트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미국에 관한 러시아의 주요 주장을 정리, “거짓 내러티브 조작”이라고 규정했었다.
라브로프 장관은 이런 자료를 “매우 흥미롭다”라면서도 “국무부의 모든 사람들이 이 자료를 연구한 건 아니기를, 우리 제안의 본질에 관해 일한 이들도 있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블링컨 장관에게 “당신이 이 협상에서 돌파구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한 걸 성명을 들었다”라며 “우리도 이 협상에서 돌파구를 기대하지 않는다”라고 신경전을 이어 갔다.
블링컨 장관은 전날 베를린 회견에서 현 상황을 “우리가 마주한 어려운 문제들”이라고 규정하고, “빠르게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내일(21일) 제네바에서 우리가 이를 해결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라고 했었다.
라브로프 장관은 이어 “우리는 우리의 구체적인 제안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원한다”라며 “타국의 안보를 대가로 자국의 안보를 강화하지 않는다는 각국의 의무”를 거론했다. 이어 “미국이 이런 의무와 원칙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듣는 건 흥미로울 것”이라고 했다.
뒤이어 입을 연 블링컨 장관은 이번 회동을 “긴장을 완화하고 향후 우크라이나를 향한 러시아의 침략을 막으려는 일환”이라고 발언, 대면 장소에서도 ‘침략’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이어 “차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화와 외교”를 거론하면서도, “만약 (외교적 해결이) 불가능함이 증명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략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면, (미국과 동맹은) 단합되고, 신속하고, 가혹한 대응을 하기로 약속했다”라고 했다.
블링컨 장관은 아울러 러시아에 구금된 미국 국적자 트레버 리드와 폴 웨일런을 거론, “러시아가 옳은 일을 하고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를 요구한다”라고 했다.
블링컨 장관은 “지금은 결정적인 순간”이라며 “당신이 옳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의 차이를 해결하리라 기대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외교와 대화의 길이 여전히 열려 있는지 시험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공개 발언은 통역을 포함해 6분 정도 이어졌다.
이날 담판에서 양측은 일단 우크라이나 문제와 러시아가 요구하는 안보 보장안에 관해 대화를 이어 가기로 했다. 이에 따라 목전으로 다가온 것으로 보였던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에서의 무력 충돌은 당분간 유예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블링컨 장관은 담판 후 기자회견에서 “라브로프 장관과 나는 외교적 프로세스 지속이 중요하고 동의했다”라며 “향후 며칠 동맹·파트너국가와 협의를 거쳐 우리의 우려와 아이디어를 더 세부이고 서면의 형태로 다음 주 러시아에 공유할 수 있으리라 예상한다”라고 했다.
아울러 그는 이번 회담을 “솔직하고 실질적”이라고 평가하고, “오늘 어떤 주요한 돌파구도 생기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나는 우리가 이제 서로의 입장과 우려를 이해하는 명확한 길에 있다고 믿는다”라고 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별도로 연 브리핑에서 역시 이번 회담을 건설적이고 유용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 말할 순 없다”며 “미국의 답을 받으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타스통신에 따르면 라브로프 장관은 다만 브리핑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처음에는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이제는 러시아에 대항해 행동한다”라며 나토 확장 금지의 중요성을 재차 설파했다.
AP통신은 이번 회담에 따라 며칠 동안이라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두 장관이 외교적 논의를 계속할 것임을 시사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