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의 시집 ‘편의점에서 잠깐’이 창비시선에서 출간됐다.
시인 정호승은 ‘시인의 말’을 통해 “50여년 동안이나 시를 써내 시의 샘이 말라버렸다고 여겼다. 누가 그 샘을 파묻어버린 게 아니라 아예 수원지가 고갈되었다고 여겼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물과 밥을 먹어야 하듯 시인도 죽지 않으려면 시를 생각하고 써야 했다. 시를 쓰기 시작하자 말라버린 시의 샘에 조금씩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 물을 꾸준히 퍼내자 샘은 마를 듯 하다가 마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50여년의 시력(詩歷)에도 진부함에 매몰되지 않는 힘, 바로 여기서 정호승이 “아주 오래된 시인이자 동시에 아주 새로운 시인”(김승희 시인의 추천사)인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정호승 시의 진수는 삶의 이면을 꿰뚫는 역설의 힘에 있다. 시인은 패배와 성공, 행복과 불행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를 새로운 사유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세상이 실패라고 규정하는 것들에서 오히려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발견한다.
“추락을 경험해보지 않은 새는 날지 못한다/ 비상이 추락이 되는 순간 추락하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 이별을 경험해보지 않은 자는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이 이별이 되는 순간/ 이별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다/ 이별 또한 사랑하는 마음에 속한다 (후략)” (16쪽 ‘추락’)
“나는 패배가 고맙다/ 내게 패배가 없었다면/ 살아남을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패배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패배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중략)//내게 패배가 없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패배했기 때문에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었다“
(12~13쪽, ‘패배에 대하여’)
시인은 익숙한 위로를 넘어, 한층 깊어진 순결한 원숙미를 보여준다. 우리가 그의 시에서 감동과 위로를 받는 것은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 가장 빛나는 가치를 길어 올리기 때문이다. 그는 패배 속에서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어리석음이야말로 진정한 현명함이라고 노래한다.
“사람들이 나를 어리석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리석기 때문에 현명하다고/ 어리석음은 나를 현명하게 한다고// 오늘도 배가 고파 밤송이를 통째 삼켜버려도/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이사를 가도/ 어리석음은 나의 재산이다/ 어리석은 현명함은 나의 유일한 재산이다 (후략)” (15쪽, ‘어리석음에 대하여’)
정호승의 시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들이 반짝인다. 또한 모든 것을 달관한 현자의 목소리 대신, 끝내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까지 숨김없이 드러내는 인간적인 고백을 들려준다.
“(전략) 나는 결국 사랑보다 증오의 사람입니다/ 사랑에도 증오가 필요하다는/ 당신의 가르침을 잊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언제나 사랑보다 증오가 강합니다/ 오늘도 분노는 사그라졌지만 증오는 깊어졌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만이 증오를 실천한다지만/ 나는 증오함으로써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100~101쪽, ‘당신의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