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수무책으로 습격당한 세기의 대역병 코비드에서 이제 겨우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려는 즈음 때아닌 유럽 한구석에서 일어난 2.5차 세계대전같은 무력전쟁으로 인해 어두워진 세계경제로 삶이 다시 어려워진 사이에도 어김없이
4월은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어려운 환란이 덮쳐도 다가오는 세월을 어쩌지 못한다는 말을 절감하게 된다.
4월은 목련의 달이다. 아름답지만 왠지 외로운 꽃.
시인 박목월은 ’4월의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그런가 하면 이해인 수녀는 ‘4월의 시’에서 ‘세상은 오만 가지 색색의 고운 꽃들이/ 자기가 제일인 양/ 활짝들 피었답니다.’ 라고 노래했다.
하지만 박목월 시인의 낭만도, 이해인 수녀의 서정도 모두 빼앗긴지 벌써 3년째다. 코비드와의 전쟁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마음에 더 무겁게 다가오는 유명한 시구(詩句)가 있다.
미국태생 영국작가 T. S. 엘리엇 (T S Eliot) 이 1922년에 발표한 장시(長詩) ‘황무지 (The Waste Land)’의 첫 구절이다.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 꽃을 피우며/ 추억에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일깨운다.‘
봄이 시작되는 4월은 부활의 계절이요 생명의 시간인데도 그는 왜 4월을 그토록 잔인한 달이라고 했을까? 엘리엇 개인은 자신의 이 시(詩)에 대해 ‘무의미한 인생에 대한 개인적인 불평’ 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그를 연구하는 작가들은 그가 프랑스 유학 시절에 만난 한 의대생을 잃은 슬픔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엘리엇이 좋아했던 그 의대생은 1차 세계대전 때 해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그러자 이에 충격을 받은 엘리엇은 그 해 한 여인과 쫓기듯 결혼을 했는데 생활이 내내 불행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요양 차 들른 스위스 로잔 호숫가에서 이 시를 썼다. 이러한 사연으로 인한 개인적 상심을 나타낸 시라는 거다.
하지만 이보다 더 일반적인 설명은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현실은 부활이 불가능해 보일 만큼 황폐했기에 거기서 오는 상실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부활할 수 없는 봄은 희망고문처럼 잔인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는 이유에서다.
아무튼 ‘황무지’ 서두에는 매일매일 출근하러 별 생각 없이 런던 브리지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단테 ‘신곡’ 지옥 편의 ‘죽은 자들의 행렬’에 비유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마치 코비드의 습격에 아무 대책없이 소름 끼치도록 전 세계가 패닉 상태에 빠졌던 2020년 봄의 모습을 겹쳐 떠오르게 한다.
바이러스와의 전쟁도 모자라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끝난 줄 알았던 무력 침략 전쟁 중이다.
전쟁은 정신적 박탈감과 황폐함 그리고 참담함을 느끼게 한다.
이로 인해 인류는 생존의 파괴를 경험하고 정신적으로 메마르게 되지만 그럼에도 인류는 전쟁이 끝나면 또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해 다시 일어나 나아간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반드시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다. 인간은 언제나 그리해왔다.
4월이 잔인하다고 했던 엘리엇 역시 자신의 시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샨티 샨티 샨티 (Shantih)!’ 산스크리스트 어로 ‘평화’를 의미하는 주문이다. 부활에 대한 염원일 게다. 인내의 고통이 언젠가는 반드시 기쁨으로 바뀌어 다가온다는 것을 바라면서 머지않아 지구촌에 평화가 다시 찾아오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해 본다.
‘April showers bring May flowers’ 4월의 소나기가 5월의 꽃을 피우듯 말이다. ‘샨티 샨티 샨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