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이자 ‘위대한 국민 시인’ 등으로 불린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詩) 일부다. 푸시킨은 당대 사교계의 여왕이라는 나탈리아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나탈리아는 결혼 후에도 많은 염문을 뿌렸다.
그러다가 프랑스인 귀족 조르주 단테스와의 관계에 대한 소문으로 푸시킨과 단테스 사이에 악화된 감정은 결투로 이어지고 결국 푸시킨은 38세의 나이에 비운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헌데 그들을 결투까지 몰고 가게된 불륜의 소문은 푸시킨을 적대시하는 상대들에 의해 날조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거짓 소문으로 인한 불운에 희생된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도 그 사례들이 수없이 많다. 더구나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더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 파급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소문은 칼보다도 무섭다. 소문으로 의혹의 대상이 되면 사실과 거짓을 떠나 삶의 활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명예와 인격에 금이 가고 심지어 매장되기도 한다.
컴퓨터를 매개로 상호간의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역사는 50여년이나 된다. 처음에는 이용자 신상 정보 제공 기능에서 친구 찾기 같은 기술들로 개발되던 SNS는 사람들간의 단순한 소통을 넘어 아랍의 봄, ‘재스민 혁명’을 이끌어내는 혁명적인 강한 민주화 도구로까지도 발전했다.
하지만 SNS는 사회적 문제도 낳았다. 남에게 자신을 미화하고 가식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충동에서 나타나는 허세와 과시욕. 이는 나보다 더 잘나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 자기의 처지 사이의 괴리감에서 오는 박탈감을 보상하기 위해서라지만 그 열등감과 비관은 그대로 남게 마련이다.
해서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퇴임 후 집필한 책 ‘파시즘’에서 SNS의 이러한 양면을 지적했다. 사람들이 SNS 덕분에 전세계로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진보이지만 남이 보여주는 허상과 자신의 현실을 비교하며 불행을 느끼기 쉽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들이다.
헌데 이제는 더 나아가 단순한 소문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 편가르기, 왕따, 협박을 넘어 인격살인으로 가는 폭력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죽음으로까지 내몰리게 되는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헌데 그 바탕에는 SNS의 중독이라는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는 SNS 기업의 수익이 광고에서 나오기 때문에 가짜 뉴스가 진짜 뉴스보다 6배나 빨리 전파되는 점을 이용해 광고 경쟁을 일으키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이용자가 SNS에 오래 머물수록 광고가 더 많이 들어오고 더 큰수익을 얻게 되므로 중독증상을 유도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지난 23일 의무총감이 소셜미디어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으니 강력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흡연, 에이즈, 마약, 총기에 이어 SNS가 청소년들에게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진단에서다.
장난감 제조회사나 자동차회사가 안전성 검사를 받고, 어린이 카시트 이용을 의무화하듯 SNS도 미성년자용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이용 규제도 강화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푸시킨의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슬픈 날들을 참고 견디면 / 기쁨의 날 찾아오리니 /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살고 현재는 슬픈 것 / 모든 것은 순간이고 모든 것은 지나가네’
푸시킨도 견디지 못한 고통이 감수성에 취약한 청소년들에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울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