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2년 임진왜란. 조선의 궁궐이 불길 속에 무너질 때도 조선왕조실록은 살아남았다. 국가의 기록을 한 곳에만 두지 않고 네 곳에 사본을 나누어 보관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는 472년간 왕과 궁궐, 국정과 관련된 기록을 담고 있다. 초기실록은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 사고(史庫)에만 있었는데 세종 때 성주와 전주를 더해 4곳에 보관됐다.
임진왜란 때 춘추관과 충주, 성주의 사고가 모두 불탔지만 전주사고의 실록만은 무사히 보전되었다. 이 후 이 전주사고본을 마니산으로 옮겨 4개의 실록을 새롭게 재편찬해 또 다시 춘추관과 묘향산, 오대산, 태백산에 나누어 보관했다.
500년 전 선조들은 한 곳에 모든 것을 집중하면 한 번의 재난으로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예견하고 이러한 분산 보존을 한 지혜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500년 전의 기록을 여전히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오늘의 우리는 그보다 못한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의 화재로 국가 행정이 무릎 꿇는 모습이 참담하다. 지난 달 26일, 대전의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본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주요 자원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단순 백업은 커녕, 위급 시 운영을 이어갈 시스템조차 준비되지 않았다고 한다.
클라우드 컴퓨팅 시대에, 실시간 백업이 일상화된 시대에, 한 건물의 화재로 국가 행정이 마비될 수 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6세기 그 옛날 조선의 선조들이 인력을 동원해 실록을 산중으로 옮겼던 노력을 몇 번의 클릭으로도 실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참담하기만 하다.
세계는 이미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재난 대비의 모범으로 1934년 설립된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는 독립선언서, 헌법 원본 같은 필수 기록을 반지하 벙커와 분산 데이터센터에 보관하고 화재나 홍수, 사이버 공격을 대비해 매년 재난 시뮬레이션을 실시한다. 한 쪽이 마비되면 곧 다른 곳이 운영을 이어받는 시스템인 거다. 실제로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 뉴올리언스 지방 아카이브가 물에 잠겼을 때 워싱턴 본원의 복제본이 복구를 주도했다.
영국 국립기록원은 디지털 자료를 원격지와 클라우드에 동시에 보관하며, 정기적으로 복구 훈련을 한다. 일본의 경우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후 ‘Japan Disasters Digital Archive(JDA)’를 구축해, 재난 피해 기록 자체를 디지털화, 분산 저장하고 더 나아가 지진 발생 시 자동으로 데이터를 해외 서버로 이관하는 기능도 갖추었다.
스위스는 알프스 산맥 지하 깊숙이 핵전쟁에도 견딜 수 있는 데이터 보관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에스토니아는 아예 국가 시스템 자체를 다중 분산 클러스터 위에 올려, 재해나 사이버 공격에도 중단 없는 운영이 가능하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같은 개발도상국도 홍수 대비로 ‘하이브리드 아카이브’를 도입했다.
국가뿐 아니라 글로벌 개인 기업도 마찬가지다.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는 ‘멀티 리전’ 전략을 기본으로 한다. 하나의 서비스가 최소 3개 대륙에 걸쳐 분산 운영되며, 한 지역이 파괴되어도 서비스는 중단 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운영 연속성’을 위한 체계적이고 구체적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연간 훈련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테스트까지 한다.
조선 춘추관의 4중 분산 전략이나 해외 사례처럼 ‘운영 연속성’이 중요한 기록들을 영원히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재난은 피할 수 없으나, 그로 인한 마비는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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