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는 걸작이다. 이 얘기를 여기서 시작하고 싶다. 첫 번째 핵 폭발 실험, 트리니티 테스트 장면 말이다. 이 시퀀스엔 ‘오펜하이머’의 정수(精髓)가 있다. 대형 폭발 장면을 컴퓨터 그래픽(CG) 없이 만들었다는 게 회자되지만, 이 사실은 생각보다 덜 중요하다. 오히려 일부 관객은 이 대목에서 ‘오펜하이머’에 실망할지 모른다. 폭발의 스펙터클이 예상보다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폭발의 충격이 아니라 의미다. 폭발 직후 사운드를 제거했다가 후폭풍과 함께 느닷없이 굉음이 터져나오게 한 연출. 이건 오펜하이머의 핵 폭탄 개발에 관한 비유다. 핵 개발이 그의 삶과 전 세계 인류에 끼친 영향은 폭탄 제조 직후보다는 시간이 흐른 뒤 더 큰 파급효과로 나타났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리고 핵 폭발로 생긴 빛이 그 장면을 관측하는 오펜하이머의 얼굴로 쏟아지는 바로 그 신(scene) 역시 지나칠 수 없다. 이건 상징이다. 그 강렬한 빛에는 먼지 알갱이가 섞여 있다. 당연히 이 말을 떠올리게 된다.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말하자면 이 장면엔 양자 역학이 있다. 그리고 빛의 이중성은 곧 오펜하이머라는 인간과 그가 한 일의 이중성이다.
다시 말해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을 극화하고 시각화하며 인간화한다. 그렇게 ‘핵폭탄의 아버지’라는 말로 간단히 요약되는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삶을 구체화한다. 이 시도에는 범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야망이 있다. 그리고 놀런 감독에겐 그 야심을 실현해낼 능력이 있다. 스릴러 영화와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SF 영화와 전쟁 영화에서, 그리고 액션 영화에서도 전에 본 적 없는 작품을 만들어냈던 그는 전기(傳記) 영화에 이르러서도 관객이 이 장르 어떤 영화에서도 경험해본 적 없는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게 한다. 그렇게 ‘오펜하이머’의 목표는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업적을 추어올리는 게 아니라 이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파내려가는 게 된다. 놀런 감독은 지적이고 정교하게, 감각적이고 격정적으로 영화를 이끌고 전진하면서 관객 역시 오펜하이머가 한 일에 감탄하기보다 오펜하이머와 그가 한 일에 관해 고민하게 한다. 영화와 영화감독에게 어울리는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오펜하이머’와 놀런 감독에겐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는 강력한 리더십과 추진력이 있다.
‘오펜하이머’의 플롯은 곧 메시지다. 영화에는 1954년 오펜하이머의 비공개 청문회, 1959년 오펜하이머의 숙적 루이스 스트로스의 상무 장관 청문회, 오펜하이머가 영국과 독일을 거쳐 미국에 와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1945년 일본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기까지를 그린 세 가지 타임 라인이 있다. 여기에 종종 플래시백도 끼어든다. 이 플롯은 쉽게 할 수 있는 얘기를 부러 어렵게 꼬아놓은 기교가 아니라 이렇게 해야만 오펜하이머라는 모호한 인간을 제한된 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가늠해볼 수 있다는 고백이다. 오펜하이머에 관해 얘기하는 게 필연적으로 그가 산 격동의 시대를 조망하는 것이라는 점도 영화를 이같은 플롯 안으로 끌어들인다. 심약한 과학자는 세계 명운을 건 프로젝트를 이끈 리더가 됐고, 영웅으로 칭송 받다가 빨갱이로 전락했으며, 잃어버린 명예를 복권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과 종전, 냉전과 매카시즘 등 시대의 혼란 속에서 그의 삶은 요동쳤다. ‘오펜하이머’의 비선형 플롯은 그의 행적과 그를 감싼 시대상의 조각을 동시에 띄워놓고 어떤 모양이 나타나는지 지켜보는 모자이크 같다.
컬러와 흑백을 오가는 방식은 3단 플롯과 함께 ‘오펜하이머’를 떠받치는 또 다른 형식적 기둥이다. 영화는 스트로스 청문회와 그의 회고는 흑백으로, 오펜하이머 청문회를 포함한 나머지 부분은 컬러로 보여준다. 컬러 부분은 오펜하이머의 시점이며 상대적으로 더 객관적인 주장이 있는 공간, 흑백 부분은 스트로스의 시점이며 상대적으로 더 주관적인 주장이 있는 공간으로 추측된다. ‘오펜하이머’의 컬러-흑백 구도는 이처럼 직접적이고 명확하기에 마치 빛(컬러)을 지지하고, 어둠(흑백)을 탄핵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 연출의 목표는 오히려 어떤 시각으로 보더라도 오펜하이머라는 인간과 그의 삶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는 걸 명확히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청문회에선 이 말이 똑같이 반복된다. “이건 재판이 아니다. 발언에 대한 입증 책임이 없다.” 더 객관적이고, 더 주관적일 순 있으나 컬러와 흑백 어디에도 완벽한 진실은 없고 주장만 존재하기에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걸 강조하는 대사일 게다.
놀런 감독은 ‘오펜하이머’ 컬러 부분에 ‘핵분열'(fission), 흑백 부분엔 ‘핵융합'(fusion)이라는 부제를 달아놓은 것 뿐만 아니라(오펜하이머는 핵분열을 통한 폭탄을 개발했으나 핵융합을 통한 폭탄 개발엔 반대했다) 이 영화 스토리 자체를 핵분열과 핵융합 그리고 연쇄 반응(chain reaction)으로 구조화 한다. 다시 말해 ‘오펜하이머’가 곧 핵폭탄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물리학자들이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에 한 데 모이고 미국이 돈과 기술을 맨해튼 프로젝트에 집중시켜 트리니티 테스트를 성공시키기까지는 핵융합처럼 보인다. 핵폭탄이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진 이후 냉전이 시작되고 얼어붙어 세계가 다시 한 번 쪼개지는 건 마치 핵분열 같고, 핵폭탄이 일본의 항복 선언을 받아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시작으로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힘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한 건 오펜하이머가 우려한 연쇄 반응처럼 보인다. 오펜하이머 역시 모두가 한 목소리로 자신을 칭송하던 시기와 모두가 다른 목소리로 자신을 비난하며 난도질하는 시대를 차례로 겪었다. 그리고 이제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갈래로 엇갈려 있다.
‘오펜하이머’를 이처럼 세 가지 형식으로 구성한 건 그만큼 오펜하이머가 한 두 가지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얘기다. 그는 핵폭탄을 개발해 놓고 핵폭탄에 반대했다. 미국의 청년들을 집에 돌아올 수 있게 했으나 최소 20만명의 일본 민간인을 죽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구국의 영웅이었다가 간첩질을 한 빨갱이가 됐다. 공산당원은 아니었지만 공산당원 친구가 많았고, 키티를 사랑했으나 진 태틀록을 잊지 못했으며, 천재 과학자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행정가이고 정치인이자 세일즈맨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히틀러에게 핵폭탄을 선사하지 못한 게 한이라고 외치면서도 핵폭탄을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빛과 어둠의 영화이고, 입자와 파동의 영화이고, 융합과 분열의 영화이고, 컬러와 흑백의 영화이고, 삶과 죽음의 영화이고, 구원과 절멸의 영화이고, 애국과 매국의 영화이고, 이론과 실험의 영화이고, 종전과 개전의 영화이다. 오펜하이머는 트리니티 실험에 성공한 뒤 말한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오펜하이머’의 형식과 구조를 관객이 실감하게 하는 건 결국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배우 킬리언 머피다. 얼굴 클로즈업이 유독 많은 이 작품에서 머피는 구원자이자 파괴자인 프로메테우스의 고뇌를 세공한다(이 영화는 마틴 셰인과 카이 버드가 함께 쓴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원작이다). 머피의 연기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절제돼 있다. 그의 무표정에는 자신만만함을 넘어선 오만함이 읽힌다. 마치 불도저 같은 의지도 감지된다. 두려움과 죄의식이 보인다. 좌절과 한탄이 느껴진다. 분노와 당황이 담겨 있다. 머피의 무표정엔 오만가지 감정이 함께 담있다. 이 영화가 끝내 내보이고 싶었던 게 바로 그런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펜하이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말한다. “제 손에 피가 묻은 느낌입니다.” 이 대사는 건조하기 짝이 없게 내뱉어지지만, 관객은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만큼 오래 그리고 깊이 고민하지 않은 듯 단순하기만 한 트루먼 대통령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것이다. 관객에게 이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 그게 머피가 보여준 연기의 경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