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광부에서 시작해 맨손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박형만 이사장. 그의 성공은 단순히 물질적인 부를 축적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30여 년간 고향 공주와 이민 사회인 LA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건네며 ‘나눔’의 가치를 몸소 실천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자신의 피와 땀이 서린 올림픽가의 만희 매너 아파트를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만희복지재단에 기부해 자신이 평생 이어온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생활 지원금 지급 사업을 대를 이어 계속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귀감이 되고 있다. 다음은 지난 7월 16일, 그의 ‘만희 매너’에서 만나 직접 들은 박형만 이사장의 드라마 같은 인생 이야기다. 나눔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일깨워준 박형만 이사장의 감동적인 인생 이야기를 풀어봤다.
‘흙수저’ 이민 1세대의 성공 신화, 박형만 이사장
가난을 극복하고자 머나먼 타국의 검은 탄광으로 향했던 젊은 광부, 그는 땀과 눈물로 일군 부를 고스란히 사회에 환원하며 ‘나눔의 천사’로 불린다. 만희복지재단 박형만 이사장의 삶은 단순한 성공 스토리를 넘어, 고귀한 인간애와 헌신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과 따뜻한 나눔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절망의 땅을 희망의 발판으로: 파독 광부의 고뇌
1937년, 충청남도 공주의 넉넉지 못한 농가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박형만 이사장의 어린 시절은 배고픔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가난은 그의 학업의 꿈마저 꺾어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중퇴하게 만들었다. 가족의 생계를 짊어져야 했던 그는 1964년, 스물일곱의 나이에 머나먼 독일 땅의 탄광으로 향하는 험난한 길을 택했다. 낯선 환경, 언어의 장벽,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깊은 탄광 속에서의 노동은 상상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고국에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며,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3년간의 고된 광부 생활은 젊은 박형만에게 깊은 성찰의 시간을 선사했다. 그는 돈의 가치와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동료 광부들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연대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독일에서의 경험은 그의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훗날 그가 물질적인 성공에 매몰되지 않고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토대가 되었다.
꿈을 향한 또 다른 도전
독일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돈을 모으던 박형만 이사장에게 그의 공군 통역장교 형님은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새로운 기회의 땅, 아메리카에서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형님의 조언에 용기를 얻어 그는 1967년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서의 초기 생활 역시 순탄치 않았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낯선 땅에서 그는 청소, 막노동, 식당의 허드렛일 등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긍정적인 자세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낮에는 땀 흘려 일하고, 밤에는 영어 공부에 매진하는 그의 노력은 서서히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며 사업가로서의 기반을 다졌고, 이후 부동산 투자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현재 그는 LA 지역에 23개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으며, 토랜스에는 콘도를 건립 중일 정도로 탄탄한 재력을 갖추게 되었다.

나눔으로 꽃 피운 성공, 만희복지재단의 숭고한 정신
미국에서 눈부신 성공을 이룬 박형만 이사장은 어린 시절의 가난했던 기억과 독일에서의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부가 온전히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의 도움과 기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념으로 그는 1996년, 자신의 이름 ‘만(萬)’ 자와 부인 ‘희(喜)’ 자를 따서 만희복지재단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나눔의 삶을 시작했다.

만희복지재단을 통해 박 이사장은 지난 29년간 고향인 공주와 LA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꾸준히 지원해왔다. 특히 고향인 공주에는 매년 생활지원금을 기부하며, 독거노인, 장애인, 소년소녀 가장 등 소외된 이웃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또, LA 지역에서도 저소득층, 노숙자, 장애인, 그리고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들을 위한 기부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의 크고 작은 도움을 받은 어려운 이웃들은 2천여 명에 달한다.
그의 나눔은 단순한 물질적인 지원을 넘어선다. 그는 수혜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진심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공감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의 진심은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만희 매너’에 담긴 숭고한 약속
박형만 이사장의 나눔 철학은 그의 소유한 부동산을 통해 더욱 확고하게 드러난다. 그는 LA 한인타운 올림픽가에 위치한 ‘Magnolia of Olympic’ 부티크 아파트를 만희복지재단에 기부하겠다는 숭고한 약속을 했다. 현재 아파트에 남아있는 융자금을 모두 갚는 대로 재단에 소유권을 이전할 예정이다.
그는 자녀들에게 물질적인 유산보다는 나눔의 정신을 물려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죽으면 재산 전부를 사회에 환원할 것이다”라고 공언한 그의 삶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귀감으로 남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박 이사장이 만희재단에 기부를 약속한 ‘만희 매너’아파트는 지난2016년 4월 착공하여 2020년 3월 완공된 이 주상복합 건물은 70유닛 규모로, 약 4,000만~4,500만 달러의 가치로 평가된다. 현재 만희재단은 이 아파트에서 나오는 임대 수익을 전액 재단의 기금으로 사용해 사회를 위한 나눔에 쓰이고 있다.
‘기부천사 박형만’을 노래한 시인
박형만 이사장의 따뜻한 나눔과 헌신적인 삶은 문학 작품으로 승화되기도 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나태주 시인은 박 이사장을 <기부천사>라며 그의 아름다운 마음과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도 했다. 시인의 섬세한 언어로 그려진 박 이사장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며, 나눔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멈추지 않는 나눔의 발걸음
2024년, 박형만 이사장은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국민포장을 수상하며 그의 헌신적인 나눔 활동을 국가적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국립공주대학교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도 더욱 활발한 나눔 활동을 펼쳐나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한편, 만희복지재단이 주관한 ‘2025 생활지원금 전달식’이 지난 17일(화) LA 시니어센터에서 열렸다. 1996년 재단 설립 이후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박형만 이사장이 고향인 충남 공주와 LA에서 매년 이어온 나눔 행사가 올해로 28번째를 맞았다.
이날 박형만 이사장은 “고향과 미국에서 받은 고마움을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밝히며, 한인과 LA 지역 저소득 주민들을 위한 꾸준한 기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도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등 50명에게 1인당 1,000달러씩 총 5만 달러가 전달되었으며, 과거 인연이 있는 아동병원에도 후원금을 기부하는 등 그의 나눔은 계속되고 있다.
한편 박형만 이사장은 1976년 남가주 서독동우회 회장을 시작으로, 1978년 충남 공주향우회 회장, 1981년 코리아타운번영회 이사장(한인축제재단 전신)을 역임했다. 이어 1988년과 1998년 두 차례에 걸쳐 남가주한국학원 이사장을 맡았으며, 1999년에는 남가주한인재단 이사장과 한인아파트소유주협회 이사장을 동시에 역임했다. 이후 2007년에는 한미동포재단 이사장, 2011년 미주한국문화유산재단 이사장, 2013년 타운 노인 및 커뮤니티센터 이사장을 거쳐, 2019년 다시 남가주한국학원 이사장에 선임되며 한인 사회의 다양한 핵심 단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김상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