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국가들이 그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한계선’으로 삼았던 금기를 깨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서방이 지원한 무기로 러시아 본토를 직접 타격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우크라이나에 파병하는 문제도 계속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는 이례적으로 전술핵무기 훈련 계획을 공개했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후과”를 경고했다. 긴장이 높아지면서 러우 전쟁이 새 국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英·佛·나토·EU “우크라 방어권”…獨, 소극적 동의
서방이 무기 사용 제한 조건을 걸었던 것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러시아의 전면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을 경계한 조치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자체적으로 생산한 무인기(UAV·드론)으로 러시아 영토 내 정유시설 등을 제한적으로 공격해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최근 북부 하르키우주 등에서 크게 밀리는 등 수세에 몰린 데다 종전 돌파구도 보이지 않아 도박을 걸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서방 무기 사용을 가장 먼저 입에 올린 것은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무장관이다. 그는 지난 2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방문한 자리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부(영토)를 공격하고 있는 만큼 우크라이나도 러시아 내부를 공격할 권리가 있다”며 “영국이 지원한 무기로 러시아 영토를 공격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나토 수장인 옌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지난 24일자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가 서방 무기로 러시아 깊숙한 곳까지 공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면서 “서방 무기 사용 규제를 완화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27일 불가리아에서도 “그것은 유엔 헌장과 국제법에도 담겨 있는 자위권”이라고 했다. 지금과 같은 제한은 “한 손 묶고 방어하라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나토’가 아닌 ‘개별 동맹국’이 결정할 문제라면서, 나토 전체 차원의 문제로 가져오는 것엔 거리를 뒀다.
같은 날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도 “러시아 영토 내 군사 목표물에 서방 무기 사용 제한을 해제하는 안을 논의했다”며서 “이것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논쟁”이라고 했다.
‘파병론’ 등 선도적으로 이슈를 던져 온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8일 국빈방문 중인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목소리를 냈다. 마크롱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러시아 군사기지를 무력화하기 위해 무기 사용을 허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러시아의 다른 목표물, 민간 시설을 건드리는 것은 허용해선 안 된다”고 조건을 달았다.
숄츠 총리도 “무기 공급 국가의 조건을 존중”하는 것을 것을 전제로 마크롱 대통령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숄츠 총리는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독일산 장거리 공대지 순항미사일 ‘타우러스’를 공급하는 것은 거부했다.
美 “현재로선 입장 변화 없어”…물밑 토론 중인 듯
반면 미국은 좀 더 복잡해 보인다. 현재까지 공식적인 입장은 “변함 없다”이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 소통보좌관은 “현재 시점에서 우리 정책에는 변화가 없다. 우리는 러시아 내부(영토)를 공격하기 위해 미국이 공급하는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장려하거나 허용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 밑에선 좀 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22일자 보도에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14~15일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뒤 돌아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에게 무기 사용 제한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바이든 행정부 내에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계속 설득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난 20일 “계속 논의 중”이라면서도, 당시 “긍정적인 것은 없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서방의 군사 지원 속도가 너무 느리다. 모든 결정이 1년 정도 지연됐다”면서 특히 방공망은 “한 걸음 전진했지만, 그 전에 두 걸음 후퇴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푸틴 “심각한 결과” 경고
푸틴 대통령은 28일 우즈베키스탄 국빈방문 중 서방 국가들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영토를 공격하는데 무기를 사용하도록 허용할 경우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푸틴 대통령은 “유럽, 특히 작은 국가들은 그들이 무엇을 갖고 노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많은 유럽 국가들은 ‘작은 영토’와 ‘높은 인구 밀집도’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면서 “그들은 러시아 영토 깊숙이 공격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러시아가 실제 어떻게 대응할지는 미지수다.
푸틴 대통령은 상황이 악화될 때 종종 이런 수사를 했던 점에 비춰볼 때 그렇다. 그러나 전쟁이 새 국면으로 전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특히 러시아 영토를 직접 타격하는 것은 ‘실존적 위협’이고, 여기에 서방이 ‘개입’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저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을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는 이런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27일(현지시각) 독일 드레스덴에 위치한 드레스덴 프라우엥키르헤(성모교회) 광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4.05.29.
“우크라에 교관 등 파병 논의 중”
이런 가운데 서방 군대의 우크라이나 파병 논의도 진행 중이다. 다만 전투병이 아닌 전선 인근에서 우크라이나 장병들을 훈련시키는 교관 등이다.
우크라이나는 프랑스의 첫 교관이 파견된다고 발표했다가 곧 번복하기도 했다.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은 27일 프랑스 국방장관과 화상 회의 후 “첫 프랑스 교관들이 우리 훈련소를 방문하는 것을 허용하는 문서에 이미 서명했다”고 했는데, 이후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우리는 지난 2월부터 프랑스 및 다른 국가들과 우크라이나 군인 훈련을 위해 현장에 외국인 교관을 파견하는 것을 논의해 왔고, 지금도 논의 중”이라는 성명을 냈다.
다만 서방의 병력이 이미 우크라이나에 들어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카야 칼라스 에스토니아 총리는 최근 “이미 현장에서 군인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국가들이 있다”고 말했는데, 특정 국가의 이름이나 작전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서방 용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새로운 것이 없다”며 “우리는 (도청으로) 영어, 프랑스어, 폴란드어를 듣는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서방 군대를 ‘합법적인 표적’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의 우크라이나 파병론은 좋은 결정이 아니다”며 유럽 전역이 분쟁에 휘말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