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천 칼럼(9) ‘고상한’ (snobbish) 영국인의 위선과 체면

영국인과 프랑스인 여러 명이 함께 마차를 타고 나들이를 갔다. 가는 동안 영국인들은 체면치레를 하며 점잖은 체 말을 하는 반면 프랑스인들은 특유의 콧소리를 내며 수다스럽게 떠들어냈다. 한참을 가다가 큰 개울을 건너게 되었는데 그만 마차가 미끄러지면서 바퀴 하나가 난간에 걸리고 기우뚱 거리게 되었다.
  모두 놀라서 마차 밖으로 뛰쳐나오고 프랑스인 몇 사람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마부를 도와 바퀴를 끌어올리려고 분주히 움직이면서도 난리 난 듯 더 시끄럽게 수선을 떨었다. 반면 영국인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조용히 한 발 물러서 있었다.
  얼마 후 마차는 다리위로 끌어올려졌고 모두 다시 가던 길로 향했다. 헌데 마차 안에 다시 들어서자 프랑스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전처럼 그냥 이런저런 수다 떨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겉으로 보기에 차분해 보였지만 안색은 달랐다. 이런 사고가 또 생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근심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침묵 속에 속앓이를 하며 가고 있었던 거다. 

  영국인과 프랑스인의 국민성을 빗댄 풍자다. 프랑스인은 즉흥적이고 가벼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실적이요 인내심이 강한 반면 영국인은 겉으로 보기엔 신사요 예의 있는 모습 같지만 그 실상은 이기심과 오만이라는 이중성.
  영국에서 16세기 이후 귀족이 몰락하면서 귀족보다는 낮으나 자영농인 요우먼(Yeoman) 보다는 높은 계층이 생겨났는데 이를 젠트리(Gentry)라 불렀다. 말하자면 신분상 귀족은 아니면서도 가문의 휘장을 사용할 수 있는 중상류층을 말한다.  
  당시 영국은 철저한 장남 상속 제도여서 귀족 작위와 대부분의 재산은 장남만이 상속받았고 차남 이하는 제외됐다. 

따라서 이들은 명색이 귀족의 혈통이었기 때문에 체면상 낮은 지위의 직업보다는 고귀한 일로 여겨졌던 성직자나 군인 등을 택하면서 젠트리로 편입되었다. 그런가 하면 부유한 평민이 영지를 사들여 지주가 되어 젠트리가 되기도 했으니 젠트리의 폭은 다양해 법률가 같은 전문직을 포함 당시 사회전반에 걸친 지배계급이었다. 우리로 말하면 일종의 양반계급층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헌데 당시 유럽에서는 신분이 다른 계급과 결혼할 경우 (귀천상혼:貴賤相婚, Morganatic Marriage) 그 배우자와 자식들의 상속권을 배제했는데 이는 재산이 분할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영국은 이미 장남 상속제를 실행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 때문에 영국은 차이 나는 계급간의 결혼이 어느정도 자유로웠다. (귀천상혼은 신분계급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을 말한다. 귀족과 평민간의 결혼 뿐 아니라, 왕족과 비왕족 귀족 간의 결혼도 이에 해당한다. 이 때 귀천상혼한 부부 사이의 자녀는 작위와 특권, 상속권을 계승 받지 못한다.)

이런 사회상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 이다. 1813년 발표된 이 작품은 결혼을 부(富)와 사회적 지위 획득의 수단으로 삼아 가난한 애인을 버리고 귀족과 결혼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등 젠트리 계급의 숙녀와 상류 계급의 신사 사이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러다가 시대가 흐르면서 젠트리는 계급의 개념은 약해지고 귀족을 포함한 상류 계층을 아우르는 말로 젠틀맨(Gentleman)으로 불리게 되다가 오늘날 ‘교양 있고 예의 바른 남성’으로 되었다.
  아무튼 소설 속에서 젠트리는 겉으론 고상한 척 위선을 떤다. 이러한 젠트리의 두 얼굴은 선(善)과 악(善)의 상반된 인격을 지닌 인물을 그린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Stevenson)의 ‘지킬박사와 하이드(Dr. Jekyll and Mr. Hyde)’ 와 윌리엄 대커리 (William Thackeray) 의 풍자소설 ‘영국의 속물열전 (The Snobs of England)’에서도 여실히 그려졌다.

이런 ‘고상한 척, 신사인 체하는 속물’을 흔히 ‘스노브(snob)’하다고 한다. 그 어원은 불확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두 가지 설이 있다. 한 때 영국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학부생들은 입학 서류에 자신이 귀족인지 아닌지를 적어야 했는데 평민 출신들인 경우 ‘귀족이 아니다’란 뜻으로 ’without nobility’에 해당하는 라틴어 ‘sine nobilitate’를 줄여 ‘s.nob’이라고 적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은 18세기에 캠브리지 학생들이 대학생이 아닌 시민을 가리켜 미천한 계급이었던 구두 수선공을 지칭할 때 사용한 은어인 ‘snob’이라고 불렀는데 후에 그 의미가 확대되여 중류층, 상류층까지 두루 사용됐다고 한다. 이는 즉, 상류 사교계의 일원이 되기에 교양이나 취향이 좀 부족한 사람까지도 포함되면서 지위가 낮은 사람을 일컸던 말이 ‘신사인 체하며 허세부리는 사람’ 으로 변한 거다. 우리로 말하자면 ‘빈대떡 신사’인 셈이다.
  가난하고 별 볼일 없던 북해 한 구석의 조그만 섬나라에서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칼레해전의 승리로 일순간에 해양강국으로 발돋음 한 후, 젠트리 식의 두 얼굴 전략을 내세워 온갖 침략과 수탈로 세계의 반의반을 지배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의 영광을 누렸던 영국.
  이 때문에 그럴까? 유럽에 있으면서도 유럽과 하나일 수 없는 유아독존의 인식이 깊이 뿌리박혀 있는 인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유럽의 일원이 아닌 독자적 대제국의 군림에 대한 향수라고나 할까? 이는 윈스턴 처칠의 유명한 말, ‘우리는 유럽과 함께 하지만 거기에 속하지는 않는다(We are with Europe but not of it)’을 통해서도 그 속내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이러한 영국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일본을 연상케한다. 유럽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영국이나 아시아에 있으면서도 아시아기길 거부하고 서구의 일원이 되겠다는 염원으로 일찍이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주창했던 일본.
  군주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 침탈을 일삼고도 타국들과는 다르다는 선별의식도 그렇지만 영국 국기 유니언 잭과 일본제국의 욱일기의 붉은 빛살까지 너무나도 닮은 두 섬나라. 여기에 ‘위선과 체면’ 그리고 ‘칼과 국화’(혼네와 다테마에: 本音と建前)의 이중성까지. 이게 우연일까?
  아무튼 그럼에도 그나마 영국이 국제사회에서 그 위엄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나라의 위기 때마다 목숨까지 걸고 나서는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미덕 때문일 게다. 이는 영국 고위층 자제가 다니는 ‘이튼 칼리지(Eton College)’ 벽에 걸려있는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숨진 2,000여 명의 사진을 통해 조국을 위한 의무에 따른 희생을 명예와 자부심으로 삼는 이면을 보여준다. 

최근 배우 윤여정이 영국 아카제미 여우조연상 수상소감이 화제다. ‘모든 상(賞)이 의미가 있지만 특히 ‘고상한 척(snobbish)하는’ 것으로 유명한 영국인이 (나를) 좋은 배우로 인정해줘 의미가 있고 영광’이라고 한 말이 시상식에 참석한 영국 아카데미 인사들의 폭소를 터뜨리게 했다. 
  자신들의 바로 이러한 이중성의 빛과 그림자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그들이기에 윤여정의 시니컬한 유머를 웃음으로 포용한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그들의 가식적 고상함(?)과 포용의 양면성이 아닐는지. (이런 생각이 든다. 만일 타국인이 우리를 향해 ‘점잖은 체 하는 한국 양반님네들이…’ 하면서 어쩌구 저쩌구 했다면 우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하는 생각).

관련기사 “고상한 척 영국인 인정해 영광”윤여정, 영국아카데미 수상

“고상한 척 영국인 인정해 영광”윤여정, 영국아카데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