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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천 타임스케치] 원자소년 아톰, 그리고 어둠 속 ‘긴 동굴’

‘아톰’ 뒤에 숨겨진 또 다른 데즈카 오사무...아톰의 아버지가 그린 재일조선인의 비극

2026년 0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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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천 칼럼니스트

1970년대 말, 한국 어린이들에게 인기있던 만화 속 주인공이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뿔처럼 솟아오르고 발바닥에서 제트 불꽃을 내뿜으며 주먹을 불끈 쥔 채 하늘을 나는 로봇 소년, 그의 가슴 안에는 작은 원자로가 들어있었다. 해서 원자 소년, 아톰(Atom·)이다.

이 만화 연재가 시작된 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불과 7년 후의 일이었다. 어찌보면 원폭의 참화를 겪은 나라에서, 원자력을 품은 소년 로봇이 희망의 상징으로 등장했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아이로니였다.
하지만 작가 데즈카 오사무는 ‘당시 과학은 모두 장밋빛이었다. 어떻게든 과학의 힘으로 전후의 피폐한 생활에서 일어서고 싶다는 바람을 아톰에게 맡겼다’ 고 말했다. 해서 아톰은 단순한 만화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는 가난과 혼란 속에서도 내일을 꿈꾸던 아이들에게 과학이 만들어줄 빛나는 영웅이자 미래의 화신이었던 거다.

아톰을 만든 데즈카 오사무는 만화가이면서도 의학박사이기도 했고,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을 탄생시킨 개척자이기도 했다. 생애 동안 700편 이상, 약 15만 장의 만화를 그렸다. 그러나 그의 삶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프로덕션이 파산하면서 거액의 빚을 떠안고 빚 독촉 전화가 울리는 그 순간에도 만화를 그렸으며 임종 직전에 ‘부탁이니 일을 하게 해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 만화계의 거장 데즈카 오사무(왼쪽)와 그의 대표작 ‘철완 아톰’. 전후 일본 어린이들에게 과학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준 데즈카는 한편으로 재일조선인의 차별과 전쟁의 비극을 다룬 사회파 작품들도 남겼다.

그런 데즈카를 아이들의 만화가로만 기억한다면 그것은 그의 절반만 아는 것일 게다. 많은 작품 중 1983년부터 연재된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히틀러가 사실은 유대인 혈통이었음을 증명하는 비밀 문서를 둘러싸고, ‘아돌프’라는 이름을 가진 세 남자의 운명이 얽히는 대하 드라마다.

유대인 학살과 전쟁, 민족 차별의 비극이 만화라는 형식 안에서 치밀하게 펼쳐진다. 그가 이 작품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역사 고발이 아니라 인간이 이데올로기와 민족의 이름 아래 얼마나 쉽게 괴물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헌데 데즈카가 그보다 13년 앞서 세상에 내놓은 더 심도있고 더 날카로운 작품이 있었다. 1970년에 발표한 단편 ‘긴 동굴(ながい窖)’이 그것이다. 2차 대전 때, 땅굴 공사에 강제 동원돼 학대와 멸시를 당했던 조선인이 전쟁 후 일본에서 출신을 숨기고 출세하지만 결국 뿌리 깊은 차별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마지막에 사고로 죽은 딸의 신원을 확인하는 검시관에게 조선인임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이마저 부정해야했던 아버지의 비극적 장면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 작품은 발표 후 오랫동안 봉인되었다. 데즈카 오사무 전집 400권에도 수록되지 않았다. 헌데 그 봉인이 반세기만에 풀렸다. 지난 2일 일본 호세이대학 출판사가 조선반도 근현대사 전문가들의 해설을 붙여 단행본을 재출간한 것이다. 편집 담당자는 ‘재일 조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차별의 실태와 당사자의 고뇌를 이 정도까지 정면에서 그린 만화는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데즈카는 한 기고문에서 ‘조선인들은 군국주의에 희생되고 민족 역사를 짓밟힌 채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와 편견과 경멸 속에 수십 년을 살아왔다. 일본인으로서 정말 부끄럽고 죄송하다. 우린 제대로 반성하고 있는가?’하고 묻기도 했다.

아톰을 보며 미래를 꿈꾸던 시절, 그 아톰의 작가가 이미 재일 조선인의 비극을 이토록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남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그것은 이 단편 속의 주인공의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그 배경인 강제 연행과 전후의 차별은 수십만 명이 실제로 살아낸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의 신념은 아톰의 가슴 속 원자로에도, 히틀러의 광기를 추적한 아돌프에게도, 오랜세월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긴 동굴’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반세기만에 빛을 찾게된 이 작품 앞에서 ‘이 이야기는 과거의 것인가? 아직도 현재의 것인가?’ 되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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