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를 사고로 잃은 뒤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면서 홀로 동생 둘을 건사하며 살아가는 나츠오. 그는 자신의 행복을 뒤로 미룬 채 주변 사람을 따뜻하게 품는다. 심장병으로 평생을 조심스럽게 살아가야하는 유키는 어느날 공원에서 자전거를 연습하던 아이와 부딪혀 상처를 입게 되면서 아이를 가르치던 나츠오와 만나게 된다.
눈을 뜻하는 ‘유키(雪)’, 이름 그대로 맑고 조용하지만 손을 대면 금세 녹아버릴 것 같은 눈같은 여자에게 여름을 뜻하는 ‘나츠(夏)오’의 생명력이 눈부시게 나타난 것이다.
나츠오의 유일한 취미인 스쿠버 다이빙이 유키에게는 가장 금지된 것처럼 정반대의 삶을 살아오던 이들은 서로 가까워진다. 나츠오에게서 바닷속의 아름다운 장관을 들은 유키는 심장이 약한 자신은 평생 그 광경을 볼 수 없을 것이라 여긴다.
그러던 어느날 유키는 사고로 뇌사에 빠진 나츠오에게서 이식받은 그의 심장과 함께 바닷속으로 들어가 그 황홀한 현상을 보고는 여름처럼 밝고 따뜻하던 나츠오처럼 세상을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일본 드라마 ‘썸머 스노우(Summer Snow)’ 이야기다.
여름과 눈.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이 짧지만 눈부신 시간을 함께 겪는 이 드라마가 25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단순히 슬픈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삶이란 결국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어떤 순간을 만나고 어떻게 사랑했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조용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 감정의 흐름을 완성시킨 건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노르웨이 소프라노 시셀(Sissel)의 맑은 목소리 위로 팬플룻의 애잔한 선율이 겹쳐지는 동명의 노래 ‘Summer Snow’는 마치 눈이 소리 없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준다. 드라마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 아니지만 이 작품과 만나면서 마치 처음부터 이 드라마만을 위해 태어난 노래처럼 그 속으로 스며들었다.
헌데 나츠오와 유키가 이야기 하던 바닷속의 황홀한 현상이 바로 자연이 만들어낸 또 다른 ‘썸머 스노우’다. 해양학자들이 ‘마린 스노우(marine snow)’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겨울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이 아니고 햇빛이 닿는 바다 표층에서 생을 마감한 플랑크톤이 작은 유기물 조각으로 변해 천천히 심해를 향해 가라앉는 광경이 ‘하얀 눈’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
죽음처럼 보이는 이 ‘하얀 눈’ 은 사실 생명이 건네는 선물에 가깝다. 표층에서 스러진 작은 생명들의 흔적은 깊은 바다로 내려가 심해 생물들의 양식이 된다. 사라지는 조각 하나하나가 또 다른 생명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자연 속의 여름 눈과 드라마 속의 여름 눈, 그리고 노래 속의 여름 눈은 모두 서로 닮아 있다. 사랑도, 생명도 마찬가지다. 영원히 지속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흔적 하나를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문제는 지금 그 흔적을 남기는 순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이어지는 기록적인 폭염은 그저 유난히 더운 여름 하나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지구온난화가 기후 시스템 전반을 흔들고 북극과 바다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플랑크톤 생태계의 균형과 바닷속 생명의 순환에도 심상치 않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연구와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간절히 바라보았던 그 ‘썸머 스노우’는 이제 아름다운 추억이 아닌 지구가 인간에게 보내는 마지막 비명이 되어 심해의 어둠 속으로 조용히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정작 세상을 지탱해오게 한 생명을 잇는 연결 고리였을 그 눈송이들을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식을 줄 모르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즘, 잠시나마 시셀의 ‘썸머 스노우’ 노래를 들으며 심연의 ‘썸머 스노우’ 장관을 떠올려보면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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