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러시아산 석유 수입금지 조치 제재가 불거지는 가운데 러시아산 석유 매출이 다시 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국가에서 수입하고 있는지는 추적이 어려운 것으로 전해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1일 ‘목적지 불명’이라고 적힌 유조선 선적이 늘어나면서 불투명한 러시아산 석유 수입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조선 전문 웹사이트 탱커트래커스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러시아 원유를 가장 많이 사들인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향하는 러시아 항구들의 석유 수출은 이달 현재까지 하루 평균 160만 배럴로 늘었다.
러시아산 석유는 2월24일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3월 수출이 하루 130만 배럴까지 줄었었다.
또 다른 원자재 데이터 제공업체 케이플러의 자료에서도 4월 러시아산 석유 하루 유동량은 3월 중순 100만 배럴에서 130만 배럴로 증가했다.
석유 수출량은 늘었지만 이것이 어떤 나라로 향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서방 주도로 러시아산 석유 금수 조치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석유 구매자들이 거래를 지속하는 것이 자국 및 자사 평판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탱커트래커스 자료를 살펴보면 이달 현재까지 계획된 항로 없이 ‘목적지 불명’ 상태로 러시아 항구를 떠난 유조선에 적재된 석유는 1110만 배럴 규모다.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수준이며, 과거 어느 나라의 수입량보다 많은 양이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다수 국가들이 경제를 유지하고 연료 가격이 더 이상 치솟는 것을 막기 위해 원유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산 석유 구매는 결제 대금이 결국 우크라이나 침공에 투입되는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조용히 거래하기를 원한다.
분석가들과 트레이더들은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라벨이 사용된 것은 석유가 더 큰 선박으로 옮겨져 하역되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산 원유가 선박의 다른 화물과 섞이면서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는 설명이다.이들은 이 방법이 과거 이란, 베네수엘라 등 제재 대상국이 수출할 때 써온 오래된 관행이라고도 부연했다.
엘란드라 데날리호는 지난 주 지브롤터 해안에서 정박하던 중 러시아 우스트-루가 항과 연해주 항에서 출발한 유조선 3척의 석유를 전달받았다. 선박 기록을 보면 한국 인천에서 출발해 네달란드 로테르담 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트레이더들은 라트비아산 혼합물과 투르크메니스탄산 혼합물로 불리는 새로운 긍급의 정제 제품도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데, 이들 제품에는 상당한 양의 러시아산 석유가 포함돼 있다고 했다.
러시아의 석유 판매는 경제와 정부 지출의 생명선과 같은 존재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침공은 러시아 석유 무역에 큰 지장을 초래했다. 국제유가는 급등하는 와중에 러시아산 석유 가격은 폭락했고 이에 러시아 업체들은 침공 이전 시세로 판매하기 위해 고군분투 해왔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는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금지했다. EU는 전체 석유 수입량의 27% 수입을 유지하며 러시아산 에너지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는 상태다.
유럽 지도자들은 에너지 가격 인상으로 자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동맹국들의 러시아 고립 욕구를 맞추기 위한 금수 조처를 논의했다. 그러나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UBS그룹 AG의 상품분석가 조반니 스타우노보는 “EU가 러시아산 석유를 완전히 제재하는 것은 내일 임금을 40% 삭감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이어 “시장에서는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엄청난 할인이 이뤄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환경이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며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배경을 추측하기도 했다.
트레이더들에 따르면 러시아산 원유는 국제유가 벤치마크인 브렌트유보다 배럴당 20~30달러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에는 배럴당 1~2달러 정도 저렴한 수준이었는데 침공 이후 급격한 차이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알려진 바로는 러시아 석유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명확한 목적지 표시가 되어있다. 루마니아, 에스토니아, 그리스, 불가리아로 향하는 석유는 3월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네덜란드와 핀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큰 구매국으로 알려졌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경제분석가 출신 사이먼 존슨 MIT 경제학과 교수는 “그들이 침략 이전보다 더 많이 사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장기 계약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며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전면적인 금수 조치가 있을 때까지 이러한 구매행위가 계속될 수 있다”고 했다.
글로벌 위트니스와 한 연구 단체는 최근 몇 주동안 로열더치셸과 렙솔 SA, 엑손모빌, 에니 스파, 트라피구라 그룹, 비톨 그룹 등 주요 석유회사들과 상품거래회사들이 흑해와 발트해의 러시아 석유 터미널에서 EU 항구로의 원유 수송을 위한 선박을 전세냈다고 밝혔다.이 화물들은 이달 이탈리아와 스페인, 네덜란드에 도착한 것으로 나타났다.
렙솔 측은 최근 운송된 화물이 침공 전 맺은 장기계약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셸, 엑손, 에니는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 항을 통해 석유를 수송하고 있다고 했고 트라피구라는 침공 전보다 러시아산 석유를 덜 거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셸은 지난달 7일 현물시장에서 러시아산 원유 매입을 중단하겠지만 침공 전 체결한 계약 때문에 법적으로 원유 인도를 받을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이 업체는 정제제품이 혼합물이 50% 이상 함유되면 러시아산이라고 규정하며, 러시아산 원유 함유량이 49.9% 이하일 경우 거래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달 들어 러시아 수출량이 늘고 행선지 미상 석유가 많아진다는 것은 일부 석유회사들이 우회로를 찾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석가들은 일부 구매자들이 새로운 규제가 생기기 전에 서둘러 거래를 성사시키고 있고, 다른 구매자들은 침공 전 체결된 거래 분을 인도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EU 당국자들은 현재 금수방안을 논의중이지만 프랑스 선거와 독일의 반발 때문에 시점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수입금지는 시간이 걸려야 성사될 수 있을 전망이다. 일부에선 거래회사들이 이미 거래 방법을 마련한 상태라고 우려한다.
존슨 MIT 교수는 “EU에서 석유 금수조치를 취하면 해상에서 이뤄지는 선박 대 선박 운송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