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피곤합니다.(웃음) 점점 더 겸허해지는 것 같아요. 정말 많은 분들이 제 삶에 영향을 줬고, 그 영향을 통해 이 작품이 탄생했다는 걸 아니까 감사해지는 거죠.”
올해 에미(Emmys) 시상식에서 작품·감독·각본상 포함 8관왕에 오른 넷플릭스 시리즈 ‘비프'(Beef). 이 작품을 만든 이성진(43) 감독은 에미 이후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평소 존경해오던 예술가들에게 인정 받은 것 같아 기쁘기도 하지만 결국 겸손해지고 또 겸손해진다”고 말했다.
이 감독의 파트너이자 ‘비프’ 주역 중 한 명인 스티븐 연(41)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미국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제 안에 있는 가장 강렬한 마음은 결국 감사함입니다. 생각해보면 참 먼 길을 달려왔어요. 화가 나고 분노할 때도 있었죠. 하지만 결국 이런 시간들이 제가 누구인지 더 잘 알게 해줬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내가 이런 일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들이요.”
이 감독과 스티븐 연은 ‘비프’로 새 역사를 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인 혹은 한국계 감독이 만든 작품이 에미 작품·감독상을 동시에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국인 혹은 한국계 배우가 에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건 2022년 ‘오징어 게임’ 이정재 이후 두 번째였으며, 골든글로브와 에미 모두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건 스티븐 연이 처음이었다. 또 아카데미 시상식과 에미 모두에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 역시 스티븐 연이 아시아계 최초였다.
두 사람을 2일 오전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이런 날이 올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인생이란 건 참 희한하다”고 말했다. “제가 실제로 거리에서 난폭 운전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작품은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여기 앉아서 이런 대화를 하고 있을 리도 없죠. 인생이란 참 아름답고 희한하지 않나요.” 이 감독의 말을 듣던 스티븐 연도 거들었다. “감독님이 그 난폭 운전자에 관해 생각한 건 모든 게 다 추측일 뿐이잖아요. 정말 희한한 일이죠. 정말 그래요.”
에미에서 상을 받을 거라고 기대했느냐는 물음에 스티븐 연은 “예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희망하긴 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작품에 참여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우리 작품에 대한 자신감과 신뢰는 분명히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보여주는 밴다이어그램 이야기를 했다. “예술은 극심한 자기 의심과 고삐가 풀린 듯한 나르시시즘의 교집합이래요. 저도 동의해요. 어느 날에 ‘아무도 내 예술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다가 또 어떤 날엔 ‘내가 모든 상을 다 휩쓸 거야’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딱 그랬어요.”
‘비프’는 마트에서 난폭 운전 사건으로 얽힌 두 남녀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다. 분노에 찬 이들이 상대를 향한 복수를 반복하다가 내 안에 있는 어둠을 상대에게서 똑같이 발견하게 된다는 게 골자다. ‘비프’는 이 작품을 한국계 미국인, 한 발 더 나아가 이민자의 디테일들로 풀어나가며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작품에 참여한 거의 모든 출연진과 스태프는 한국계 미국인 또는 아시아계 이민자다. 다시 말해 ‘비프’는 이민자라는 특수성을 기반으로 내면의 어둠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로 나아간 작품인 것이다.
다만 이 감독과 스티븐 연은 “참여한 모든 이들의 경험이 집약돼 나온 게 ‘비프’라는 작품”이라며 “특정 개인의 경험이 구체적으로 녹아들어있다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들이 ‘비프’에 담겨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 감독은 “이 시리즈엔 수많은 경험이 담겨 있다. 그런 게 바로 우리가 하려는 창작 활동이고, 그게 바로 창작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스티븐 연은 “많은 이들의 경험과 시각이 모이면서 이야기가 점점 더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며 “그렇게 이 작품이 보편적으로 시청자에게 다가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감독은 이민자로서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는 앞으로 만든 작품들에 계속 담겨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민자의 정체성은 내 안에 박혀 있는 것이라서 그런 부분이 드러나지 않을 순 없다”는 얘기였다. 스티븐 연은 이민자 배우로서 미래를 불안해 하고 있을 과거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냐는 물음에 “편하게(relax) 생각해”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손정빈 기자> jb@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