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은 의미 있는 해였다.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이 임정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이 곳 미국에서는 ‘제1차 한인자유대회 (FIRST KOREAN CONGRESS)’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일제에 항거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3-1 운동은 무자비한 일본의 총칼에 의한 무력진압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음에도 이러한 끔찍한 폭력에 귀 기울여주는 나라는 없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국들이 전후 문제 해결에 골몰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세계 열강들은 저마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 지배를 하고 있던 터라 조선의 문제에 냉담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이러한 때에 1919년 4월14~16 일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자유대회가 열렸던 것이다. 이 대회는 서재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미주 한인 150여 명이 참석해 조국의 독립과 새 나라의 건국 비전을 온 세계에 알리는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 기독교 정신에 따른 나라를 세우려는 목적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선언문, 미국 시민에게 알리는 호소문,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을 알리는 결의문, 양식 있는 일본인에게 보내는 서한문을 작성하고 선언했다.
헌데 이 대회는 세계 각국에서 기독교, 천주교, 유대교의 지도자 등이 참여한 세계적인 집회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는데 특히 유대인 랍비이자 신문기자였던 조지 베네딕트가 애쓴 숨은 공로자였다.
베네딕트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과 이승만을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이 3·1운동의 실상을 세계에 알릴 방도가 없음을 탄식하자 그는 ‘우리가 지금 있는 이 도시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곳이고 수 개월 전 체코슬로바키아의 토마스 마사리크가 독립기념관에서 자유를 선언하기도 한 곳’이라며 ‘미국 전 지역에 있는 한국인들을 불러서 대회를 열자’고 했다.
그리고는 이 대회에 참석할 유명 인사들을 섭외하고, 대회 관련 기사들을 언론에 알리며, 미 의회에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결의안을 상정하는 일들을 적극 나서서 도왔다.
당시에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국제정세가 격변하는 틈을 타 미국 정가에 독립을 호소했던 민족들이 많았다. 아일랜드인, 폴란드인, 체코슬로바키아인 등이었다. 헌데 아일랜드나 폴란드는 미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1919년 이전에는 같은 유럽에서조차 체코의 한 지방인 보헤미아는 알아도 체코나 슬로바키아는 알지 못했던 잊혀진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마사리크가 둘 다 합쳐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독립국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 독립운동이 이승만을 비롯한 당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는데 중요한 공통점은 외교를 통한 독립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외교 노선으로 미국을 이용했다는 것이 큰 혜안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미국의 국제적 지위가 아직 강대국이 아니었음을 감안해 볼때 어려운 선택이었던 만큼 세계의 흐름을 읽는 선견과 선각없이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때 우크라이나에 있던 체코군단이 귀국 경로로 시베리아를 거쳐 불라디보스톡을 경유할 때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우리 독립군들에게 무기를 팔았다. 그 덕분에 우리 독립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3-1 독립만세운동이 105주년을 맞이했다.